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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浙東 연해안에서 高麗人의 수로 교통- 교통 유적과 지명을 중심으로 -

    朴 現 圭 (順天鄕大)

    Ⅰ. 서론

    Ⅱ. 高羅人이 진출한 수로 교통 유적과

    지명

    1. 蕭山 寧濟廟

    2. 上虞 曹娥廟

    3. 鎭海 航濟亭과 六國石刻

    4. 寧波 樂賓館, 高麗使館과 徽宗御筆

    石碑

    5. 舟山 六國港口

    6. 普陀山 高麗道頭

    7. 大陳島 高麗頭山

    Ⅲ. 결론

    Ⅰ. 서 론

    당나라 때 浙江(錢塘江)을 경계로 삼아 동쪽 지역에 浙江東道를 설

    치했고, 송나라 때 당나라의 지리 개념을 이어받아 절강동로를 두었다.

    절동 지역은 오늘날 절강성 서북쪽을 제외한 전 지역, 즉 寧波, 紹興,

    台州, 金華, 衢州, 溫州, 麗水 지역을 지칭한다. 절동 연해안 지역은 예

    로부터 수로 교통이 매우 발달하였다. 절동 동쪽에는 중국 東海를 접

    하고, 있고, 북쪽에는 杭州灣과 절동운하가 있다. 절동 지역에는 해상

    항구인 영파(明州), 태주, 온주, 舟山, 普陀山 등이 있고, 또 내수 운하

    의 중심지인 紹興(越州), 蕭山 등이 있다.

    한반도와 절동 지역 사이에는 오래 전부터 바다를 통한 수로 교통

    로가 개통되어있었고, 고려인들은 빈번히 절동 지역으로 진출하여 제

    반 활동을 전개하였다. 고려 상인과 뱃사람들은 한반도나 중국 경내에

  • 中國史硏究 第64輯 (2010. 2)44서 선박을 타고 절동 지역으로 들어와 교역과 운송에 임하였고, 특히

    고려 중엽에 절동 지역을 송나라와 공식적인 봉사 노선으로 정해진 이

    후로 해상 교류가 더욱 활발해졌다. 그래서인지 절동 수로 유역에는

    고려와 관련된 교통 유적이나 지명이 많이 남아있다.

    고려인들이 절동 지역에서 어떤 수로를 이용했는가? 이들이 진출한

    장소는 어디인가? 오늘날 그곳에는 어떠한 유적이 남아있는가? 이들

    유적과 지명이 가져다주는 의의는 어떠한지? 이 모든 사항이 매우 궁

    금하다. 필자의 과문인지는 모르겠으나, 지금까지 한반도와 절동 지역

    을 잇는 남방해로나 高麗使館, 航濟亭, 高麗道頭 등 일부 유적을 언급

    한 선행 논문만 있고, 절동 해로와 내수로에 소재한 고려인 관련 유적

    과 지명을 종합적으로 분석한 논문은 아직 나오지 않았다.

    필자는 오래 전부터 절동 지역의 한반도 관련 유적과 지명에 관해

    관심을 가지고 자료 수집에 나섰고, 이번에 자료들을 종합적으로 정리

    분석하게 되었다. 다만, 그 결과물을 내놓으면서 논술 내용의 전문성을

    제고하기 위해 신라와 고려, 즉 조대별로 두 차례 나누어 발표하고자

    한다. 지난 논문에서 일차적으로 절동 수로에서 신라인이 진출한 교통

    유적과 지명에 대해 살펴보았다.1) 이번에 그 작업을 이어받아 절동 지

    역에서 고려인들이 진출한 수로 교통 유적과 지명에 대해 살펴보고자

    한다.

    Ⅱ. 高麗人이 진출한 수로 교통 유적과 지명

    1. 蕭山 寧濟廟

    蕭山은 절강 省會인 杭州의 남대문이다. 서한 초에 이 지역에 余曁

    1) 朴現圭, 新羅人이 진출한 浙東 지역의 수로 교통 유적과 지명 (2009년 춘계정기학술발표회, 남서울대학, 韓國中國文化學會, 2009.4.25), pp.202-214.

  • 浙東 연해안에서 高麗人의 수로 교통 (朴現圭) 45縣을 설치하고, 會稽郡에 속했다. 오 黃武 연간(222-229)에 현명을 永

    興으로 개칭되었다가, 唐 天寶 원년(742)에 다시 소산으로 개칭되었다.

    1959년에 상급 소속지를 소흥에서 항주로 이관되었다. 1988년에 시가

    되었다가, 2001년에 항주에 소속된 區가 되었다.

    북송 徽宗 연간에 고려사절은 절동 지역으로 들어왔다. 이때 이들은

    浙東運河를 따라 들어와 소산을 지나갔다. 이때 고려사절은 소산을 지

  • 中國史硏究 第64輯 (2010. 2)46나갔다. (嘉泰)會稽志 권6 祠廟・蕭山縣 에서:

    寧濟廟, 在縣西南一十三里西興鎭. 政和三年, 賜今額. 六年, 高麗入貢使

    者將至, 而潮不應, 有司請禱, 潮卽大至, 詔封順應侯(四庫全書本, 486책, p.

    112).

    寧濟廟는 (소산)현 서남쪽 13리 西興鎭에 있다. 政和 3년에 지금의 사

    액을 받았다. 6년에 고려에서 입공한 사신이 장차 도착하고자 하였으나,

    물때가 맞지 않았다. 유사가 기도를 하니 조류가 즉각 크게 밀려왔다. 조

    서를 내려 順應侯로 봉해졌다.

    정화 6년(예종 11년; 1116)에 고려사신 일행이 선박을 타고 절동운

    하를 따라 소산 西興鎭으로 들어왔다. 그러나 마침 물때가 맞지 않아

    전당강을 건널 수가 없었다. 소산 유사는 이 소식을 접하고 선박이 순

    조롭게 통과할 수 있도록 寧濟廟에 나가 기도를 드렸다. 영제묘는 일

    명 潮神廟이다. 소산 서흥 沙岸 동쪽에 소재하고, 浙江潮神에게 제사지

    냈다.2) 浙江潮神은 伍子胥이다. 오자서는 춘추시대 闔閭를 도와 왕위

    를 쟁취했고 오나라를 강성하게 만드는데 커다란 공을 세웠으나, 훗날

    모함을 받아 자진했다. 오왕은 오자서의 유해를 절강(오늘날 錢塘江)에

    버렸다. 훗날 오자서는 절강을 지키는 水神이 되었다.3) 영제묘는 청

    咸豊 연간에 훼멸되었다가, 光緖 연간에 중건되었다. 건국 후 다시 훼

    멸되는 운명을 맞이했고, 그 자리에 西興中學이 들어섰다. 소산 유사가

    영조묘에 나가 기도를 드린 효험인지 마침 조류가 크게 일어나 배가

    무사히 전당강을 건너갈 수 있었다. 유사는 이 사실을 송나라 조정에

    상주했고, 조정은 영제묘에 順應侯로 봉했다.

    절동운하는 일명 西興運河 또는 杭甬運河이다. 서흥은 절동운하의

    서쪽 시작점이다. 서흥은 원래 固興이라 불리었다. 육조 때 소산 서쪽

    2) (民國)蕭山縣志稿 권7 建置門・壇廟 : “寧濟廟, 在西興鎭沙岸之東, 祀浙江潮神”(中國方志叢書本, 華中地方 84號, p.590).

    3) 越絶書 권14 德序外傳記 : “捐我深江, 則亦已矣. 胥死之後, 吳王聞, 以爲妖言, 甚咎子胥, 王使人捐於大江口, 勇士執之, 乃有遺響, 發憤馳騰, 氣若奔馬, 威淩

    萬物, 歸神大海, 彷佛之間, 音兆常在, 后世稱述, 蓋子胥水僊也”(叢書集成初編本,

    3697책, p.69).

  • 浙東 연해안에서 高麗人의 수로 교통 (朴現圭) 47에 있다고 해서 西陵이라고 불리었다가, 오월 錢鏐가 ‘陵’자가 불길하

    다고 해서 서흥으로 바뀌었다. 서흥에는 전당강을 건너 항주로 들어가

    는 부두가 있었다. 전당강 하류는 항주만에서 밀려오는 조류에 의해

    많은 영향을 받는다. 매번 사리 때가 되면 바닷물이 전당강으로 역류

    하는 현상을 볼 수 있고, 오늘날에도 조류에 의해 선박 전복이나 익사

    사고가 가끔 발생한다. 예전의 풍력선은 절동 앞 바다에서 항주만을

    통해 항주로 직접 들어가기가 무척이나 위험했다. 절동 지역으로 들어

    온 고려사신들은 모두 바다 입구인 진해에서 내수로로 들어와 절동운

    하를 통해 소산과 항주로 들어갔다. 이번에 소산에 도달한 고려사신은

    李資諒・李永 일행이다. 이들은 예종 11년(1116) 7월에 본국을 떠나 바다를 건너 영파(명주)로 나갔다.4) 이듬해 5월에 李資諒 일행은 지난

    사행에 태학에 입학한 진사 출신 金端 등과 함께 고려로 귀국했다.5)

    2. 上虞 曹娥廟

    上虞는 오늘날 절강 동부 소흥에 속해진 현급시이다. 상우 지명은

    갑골문에 등장할 정도로 역사가 아주 오래되었다. 진시황 25년(BC

    222)에 上虞縣을 설치하고, 會稽郡에 속했다. 그 후 현의 폐쇄와 복귀,

    상급 관할지의 변경 등 여러 차례 행정 변화를 겪어왔다. 1992년에 현

    에서 시로 승격되었다.

    북송 휘종 때 고려사신들은 선박을 타고 절동운하를 따라 상우로

    들어온 기록이 보인다. (寶慶)會稽續志 권3 祠廟・會稽縣 에서:

    昭順靈孝夫人廟, 在縣東七十二里曹娥鎭. 蓋漢上虞孝女曹娥也. --- 政和

    五年十一月, 以高麗遣使入貢經從, 適値小汛, 嚴祭借潮, 卽獲感應. 麗人有

    請, 加封靈孝昭順夫人(四庫全書本, 486冊, p.486).

    4) 고려사 권14 睿宗 11년, 7월 을유조: “己酉, 遣李資諒・李永如宋, 謝賜大晟樂”(亞細亞文化社本, 冊上, p.284).

    5) 고려사 권14 睿宗 12년 5월 정사조: “丁巳, 李資諒還自宋, 進士權適・趙奭・金端等, 偕資諒還”(亞細亞文化社本, 冊上, p.287).

  • 中國史硏究 第64輯 (2010. 2)48昭順靈孝夫人廟는 (회계)현 동쪽 72리 曹娥鎭에 있다. 대개 漢 上虞 효

    녀 曹娥이다. --- 정화 5년 11월에 고려에서 입공한 사신이 지나가다가,

    마침 小汛 때를 만났다. 조류를 빌려주기를 간절하게 제향을 드리니 즉각

    感應을 입었다. 고려인이 소청하니 靈孝昭順夫人으로 더해 봉해졌다.

    政和 5년(睿宗 10년: 1115) 11월에 고려사신들이 상우 曹娥江의 강

    가에서 조아강과 내수로를 통해 소흥(越州)으로 나가려고 했다. 마침

    들물이 조금씩 차오르는 小汛 때라, 조아강의 수심이 얕아 앞으로 나

    아갈 수가 없었다. 고려사신은 曹娥廟에 나가 조류가 들어오기를 간절

    하게 기도 드렸다. 그 결과, 항주만에서 조류가 밀려와 강과 운하의 수

    심이 깊어져 배가 다닐 수가 있게 되었다. 고려사신은 이 사실을 송

    휘종에게 아뢰니, 휘종은 조아묘에 靈孝昭順夫人이라는 봉호를 더하였

    다. 이때 中書舍人 毛友行은 황명을 받들어 告詞를 작성했다. 이 告詞

    에도 고려사신이 조아묘에 제향을 올린 사실과 조아묘가 이들의 기도

    를 들어주어 국가의 체통을 지켰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6)

    조아묘는 오늘날 상우 百官街道 曹娥江 옆에 소재한다. 曹娥는 후한

    시대의 효녀이다. 14살 때 부친이 강물에 빠져 죽자, 17주간 울다가 5

    월 5일에 강물에 몸을 던졌다. 5일이 지난 후에 그녀의 시신이 부친

    시신을 안고 물 위로 떠올랐다. 후한 元嘉 원년(151)에 상우현령 度尙

    은 이 소식을 접하고 조아강 옆에 무덤을 조성하고 묘우를 건립했고,

    또한 邯鄲淳에게 비문을 세우도록 했다. 훗날 蔡邕을 비롯한 문인들이

    이곳을 들려 시문을 남겼고, 조아는 중국 효녀의 상징적인 인물로 부

    상했다. 역대 조정은 이런 저런 이유로 조아에게 계속 봉호를 더하였

    는데, 고려사신의 소청에 의해 봉해진 靈孝昭順夫人도 그 중의 하나이

    다.

    조아강은 東陽縣 齊公嶺에서 발원하여 新昌, 嵊州, 上虞를 거쳐 三江

    6) (寶慶)會稽續志 권3 祠廟・會稽縣・昭順靈孝夫人廟 自註: “告詞云: 勅越州上虞縣靈孝夫人, …… 麗人來享, 有禱祠下, 義能體國, 響應甚明, 王人有言, 肆加

    封號, 仍葺廟宇, 用嘉忠勤, 嗟爾有靈, 稱此休顯, 可特封靈好昭順夫人. 中書舍人

    毛友行”(四庫全書本, 486冊, p.486).

  • 浙東 연해안에서 高麗人의 수로 교통 (朴現圭) 49口에서 항주만 입구인 전당강으로 들어간다. 총 길이는 192km이다. 조

    아강의 潮汐은 예로부터 유명하다. 조아강 조석의 위험도는 전당강보

    다 조금 떨어지지만, 제방이 무너지고 강바닥을 뒤집어놓아 모래가 쌓

    이거나 소용돌이가 쳐서 선박이 운행하기가 매우 힘들어 鐵面曹江이라

    는 칭호를 얻게 되었다.7) 한사리 때는 바닷물이 조아강 하류로 빠르게

    밀려들어와 예전의 풍력선은 이를 감당하지 못하고 전복 사고를 일으

    키는 경우가 종종 일어났다. 이와 반대로 조금 때에는 조아강의 물이

    빠져나가 수심이 얕아져 선박 운항에 지장을 초래하였다. 조아강은 절

    동운하의 중간 부분에 소재한다. 서쪽으로는 소산까지 인공 준설 구간

    이고, 동쪽은 진해까지 자연 수로 구간이다.

    이번에 조아묘에서 제향을 한 고려사신은 吏部尙書 王字之와 戶部

    侍郞 文公美를 필두로 한 사은 겸 진공사 일행이다. 예종 10년(1115) 4

    월에 국왕은 사신으로 임명된 왕자지와 문공미를 위해 順天館 樂賓亭

    에서 전별연을 벌렸다.8) 이번 일행에 고려에서 송나라 태학으로 입학

    시킬 진사출신 金端, 甄惟底, 趙奭, 康就正, 權適 등 5명도 포함되어있

    다. 왕자지・문공미 일행의 봉사 여정은 별로 순탄하지 못했던 것으로추측된다. 이들이 본국 한반도에서 출발한 시점은 예종 10년(1115) 7월

    인데,9) 이해 11월이 되어서야 비로소 조아강을 지나가기 시작했다. 이

    듬해 6월에 이들은 본국으로 돌아왔다.10)

    송나라가 사신을 고려로 파견할 때에도 절동운하를 이용하여 소산

    과 영파 구간을 오갔다. 元符 연간(1098-1100)에 송나라는 고려로 사

    7) 曹娥孝女廟誌 권1 名勝 : “曹娥江潮汐之險, 亞于錢塘, 坍沙陷溺, 舟行苦之,故號鐵面曹江”(淸光緖8年重刊影印本).

    8) 고려사 권14 睿宗 10년, 4월 갑인조: “甲寅, 王字之・文公美, 將如宋, 省侍臣樞密院承制等餞于順天館樂賓亭. 王遣內侍林景淸宣示御製詩一首兼賜酒果”(亞

    細亞文化社本, 冊上, p.278).

    9) 고려사 권14 睿宗 10년, 7월 무자조: “戊子, 遣吏部尙書王字之, 戶部侍郞文公美如宋, 謝恩兼進奉. 仍遣進士金端・甄惟底・趙奭・康就正・權適等五人赴大學”(亞細亞文化社本, 冊上, p.278).

    10) 고려사 권14 睿宗 11년, 6월 을축조: “乙丑, 王字之・文公美賫詔還自宋”(亞細亞文化社本, 冊上, p.283).

  • 中國史硏究 第64輯 (2010. 2)50신을 보냈다. 사신들은 배를 타고 절동운하의 한 구간인 조아강으로

    들어갔다가 마침 물때가 맞지 않아 船底가 강바닥에 닿아버렸다. 姚孶

    는 이 사실을 듣고 조아묘에 나가 神女, 즉 조아신에게 기도하니 마침

    조류가 몰려와 선박을 부상시켜서 이들이 조아강을 무사히 지나갈 수

    있었다.11)

    3. 鎭海 航濟亭과 六國石刻

    진해는 오늘날 절강 동부 영파에 속해있는 區이다. 북쪽으로 항주만

    을 바라보고, 동쪽으로 舟山群島와 인접하였다. 진해의 옛 이름은 浹口

    이고, 별명이 蛟川이다. 당 元和 4년(809)에 望海鎭이 설치되었다. 後梁

    開平 3년(909)에 오월왕 錢鏐의 주청에 의해 縣으로 승격되었고, 얼마

    후 현명을 定海로 개명되었다. 康熙 26년(1687)에 다시 鎭海로 개명되

    었다. 이듬해에 경내 도서 지역(옛 昌平國 일대)을 따로 떼어내어 定海

    라고 칭하고, 내륙 지역을 여전히 진해라고 칭하였다. 1985년에 영파시

    로 편입되었다.

    진해는 ‘浙東門戶’와 ‘兩浙咽喉’라는 칭호처럼 절동 지역의 바다 길목

    에 자리 잡고 있다. 이곳은 지정학적으로 절동 지역의 대외 교류 창구

    로서 해외로 드나들거나 외국인이 들어온 일이 빈번했다. 한반도 서해

    안에서 계절풍과 조류를 만나면 종종 진해 지역에 도달하곤 했다. 예

    를 들면 현종 11년(1020)에 고려 민간인 闊達이 탄 선박이 定海(진해)

    에 표착한 적이 있다.12) 송나라 때 진해는 대고려 해상 교통의 중요한

    지역으로 부상했다. 진해 관련 지방지에는 이러한 사실을 대변해주는

    유적이 보인다. (寶慶)四明志 권18, 定海縣志 권1 敍縣 에서:

    11) (延祐)四明志 권4 人物攷・姚孶 : “故復命卿易使浙部, ······朝廷遣使三韓,渡曹娥江, 非潮時行舟, 膠. 公適董其事, 禱于神女, 潮應禱而邁”(宋元方志叢刊本,

    6冊, p.6195).

    12) 續資治通鑑長編 권158 天禧四年二月丙午條: “丙午, 明州言高麗夾骨島民闊達, 以風漂舟至定海縣岸”(四庫全書本, 315冊, p.478).

  • 浙東 연해안에서 高麗人의 수로 교통 (朴現圭) 51

    航濟亭, 縣東南四十步. 元豊元年建, 爲麗使往還賜宴之地, 建炎兵毁, 遂

    廢.(續修四庫全書本, 705冊, p.282).

    航濟亭은 (진해)현 동남쪽 40보이다. 元豊 원년에 고려 사신들이 왕래

    하고 연회를 베풀기 위해 건립되었다. 建炎 연간에 병화로 훼멸되어 마침

    내 폐하였다.

    航濟亭은 송나라가 고려사신들의 편의와 연회 장소로 활용하기 위

    해 건립한 것이다. 항제정의 건립년에 관해 상기 예문에서 元豊 원년

    (1078)이라고 기술했는데, 뒤에서 다시 언급하겠지만 王應麟의 玉海는 이보다 1년 뒤인 원풍 2년(1079)이라고 기술했다.13) 이 두 문헌의

    차이는 아마도 착공년도와 완성년도의 차이가 아닐까 한다. 원풍 원년

    (1078)은 麗・宋 양국의 외교에 있어 매우 의미 있는 해이다. 려・송양국은 淳化 5년(成宗 13년; 994)에 마지막으로 사신을 보낸 이후로 80

    여 년 동안 중단되었다가, 원풍 원년(1078)에 이르러 송나라는 安燾와

    陳睦을 사신으로 삼아 다시 고려로 보냈다. 항제정은 양국 교류가 재

    개된 시점에 바로 건립되었다. 우리는 이러한 점을 통해 송나라가 대

    고려 외교를 얼마나 중시했던가를 가늠할 수 있다.

    항제정은 建炎 4년(1130) 금나라 군대가 절동 침입 때에 병화로 소

    실되었다. 상기 예문에서 항제정은 진해현 관아에서 동남쪽 40보라고

    했다. 이 지점은 대략 招寶山街道 南大街 新華書店과 百貨大樓 부근으

    로 추정된다. 1984년에 百貨大樓 부지에서 선박 잔해물이 출토되었다.

    2000년에 진해 文物管理委員會에서 百貨大樓 앞에 北宋航濟亭遺址 라

    는 석상을 세웠다. 2008년에 진해 招寶山街道는 항제정을 한중우호의

    상징물로 정하여 복원 사업에 박차를 가하여, 2009년 가을쯤 전 공정

    을 마칠 예정이다.

    진해의 용강과 항주만이 만나는 곳에 조그만 야산인 招寶山이 자리

    잡고 있다. 남북 길이는 약 600m이고 동서 길이는 약 300m이며, 해발

    13) 玉海 권172 宮室・邸驛・元豊樂賓館 : “元豊二年, 明州及定海縣作高麗貢使館. 五月二十五日, 賜名樂賓.” 自註: “亭曰航濟”(四庫全書本, 947冊, p.461).

  • 中國史硏究 第64輯 (2010. 2)52은 80.2m이다. 초보산은 본명은 候濤山이다. 지명 초보산은 외국으로

    부터 재화와 부를 불러왔다는 유래에서 나왔고, 候濤山은 선박들이 이

    곳에서 물때를 기다렸다가 출항했다는 유래에서 나왔다. 북송 淳化 원

    년(990)에 兩浙市舶司를 항주에서 진해(정해)로 옮겨왔다. 당시 고려,

    일본과 동남아시아에서 들어온 외국상선들은 진해로 들어와 招寶山 아

    래에 정박하였다. 이곳에는 외국상인들이 가져온 각종 보화와 물품들

    이 가득하여 지역 경제가 매우 활발하게 돌아갔다.

    고려 봉사에 나선 송나라 사신들은 초보산 아래에서 바다를 건너갈

    萬斛船, 즉 神舟 두 척(凌虛致遠安濟, 靈飛順濟)을 건조했다.14) 근자 진

    해 용강 부근에서 선박 잔해물이 발굴되었다. 이들은 초보산에서 출발

    하기에 앞서 總持院과 廣德王廟에 나가 무사 항해를 기원하는 제례를

    드렸다.15) 이와 반대로 정화 연간에 樓異는 진해로 들어오는 고려사신

    들을 접대할 화방 1백 척을 초보산 아래에 정박시켰다. 이때 초보산

    해로에 賜鐵符를 던지자 많은 물고기와 갑각류들이 나타나 환영했다는

    고사가 전해온다.16)

    초보산 동북단 安遠砲臺가 있는 석산을 小招寶山이라고 한다. 여기

    14) (民國)鎭海縣志 권44 雜識 중 全祖望 鐵符志 : “招寶山, 本名候濤山. 居民以當海口, 商舶所經, 百珍交集, 因以招寶名之. …… 相傳宋政和間, 沈鐵符山

    下. 按況逵 豊惠廟記 所云, 則當時所製凌虛致遠, 靈飛順濟神舟之屬, 皆在是山下

    也”(中國地方志集成本: 浙江府縣志輯, 34冊, p.845).

    15) 宣和奉使高麗圖經 권34 海道一・招寶山 : “十九日辛未, 達定海縣. 先期遣中使武功大夫容彭年建道場於總持院, 七晝夜, 仍降御香, 宣祝於顯仁助順淵聖廣德

    王祠, 神物出現, 狀如蜥蜥, 實東海龍君也”(움직이는 책, 原本, p.533).

    (民國)鎭海縣志 권13 壇廟 : “廣德王廟, 舊額東海助順孚聖廣德威濟王廟, 在縣東北五里. 宋元豊元年, 諫議大夫安燾, 起居舍人陳睦奉使高麗, 還, 十一月, 請

    建廟, 敕封淵聖廣德王, 崇寧二年, 賜額崇聖宮, 大觀四年, 加封助順二字, 仍建風

    雨二神殿於左右, 宣和三年, 又加顯靈二字, 封風神曰寧順侯, 雨神曰寧濟侯, 且撥

    賜官田五頃, 皆因高麗使回奏請也”(中國地方志集成本: 浙江府縣志輯, 34冊,

    p.326).

    16) (民國)鎭海縣志 권44 雜識 중 况逵 豊惠廟記 : “徽宗政和七年, 鄞樓异知明州, 依元豊故事, 造舫百航, 置海口, 專備高麗使臣之用, 投賜鐵符於招寶山海道

    以鎭之, 時有巨魚出迎, 長數丈鱗甲曜日, 觀者駭愕. 又用賜錢造二乘舟, 錦帆朱鬣,

    威耀若神, 固陵善之”(中國地方志集成本: 浙江府縣志輯, 34冊, p.845).

  • 浙東 연해안에서 高麗人의 수로 교통 (朴現圭) 53에 옛 仙人洞이 있었다. 선인동은 일명 潮音洞, 觀音洞이며, 동굴 안쪽

    에서 파도 소리가 들린다는 천연동굴이다. 명 嘉靖 38년(1559)에 都督

    盧鏜은 선인동의 우측 석벽에 ‘平倭第一關’, 좌측 석벽에 ‘六國來王處’

    를 각각 새겨놓았다.17) ‘六國來王處’는 예전에 외국 사신들이 진해로

    들어왔던 장소라는 의미에서 나왔다. 여기의 육국에는 당연히 고려가

    포함되었다. 애석하게도 1974년에 진해 항구를 건설할 때에 이 일대의

    암석을 채취하여 바다를 매립하는 바람에 옛 선인동은 파괴되어 흔적

    을 찾아볼 수 없다. 1989년에 해방군은 초보산 동북단 지역에서 새로

    운 仙人洞을 발견하였다. 이곳에 半方亭을 짓고, 그 위에 仙人洞 편액

    을 걸어놓았다.18)

    4. 明州(寧波) 樂賓館, 高麗使館과 徽宗御筆石碑

    앞서 논했듯이 명주(영파) 지역은 대외무역과 문화교류가 매우 왕성

    하게 이루어진 지역이다. (乾道)四明圖經에 따르면, 명주(영파)는 여러 바닷길이 모이는 곳이라 남쪽에서 복건과 광동, 동쪽에서 일본, 북

    쪽에서 高麗 상선이 드나들어 화물이 풍부하여 동남 지역의 커다란 도

    회지가 되었다고 했다.19)

    양절 지역에는 대외 교역을 관장하는 市舶司가 설치되었다. 송나라

    초는 시박사를 항주에 두었고, 淳化 원년(990)에 定海(진해)로 옮겼다

    17) (民國)鎭海縣志 권38 金石 : “六國來王處, 平倭第一關, 十大字. 嘉靖己未盧鏜書, 勒於仙人洞石壁左右.[光緖志]” 自註: “陳景沛案曰: 嘉靖志, 仙人洞內十字,

    明言盧・譚二公, 己未所勒. 王志注: 相傳爲王安石書. 嘉慶丙子夏, 邑人胡灃舟游是洞, 乘梯而上摩崖, 洗蘚, 左五字後, 得北山盧鏜書, 五小字. 右五字後, 得盧鏜

    書, 三小字. 從玆傳訛盡釋矣”(中國地方志集成本: 浙江府縣志輯, 34冊, p.765).

    18) 鎭海口海防歷史紀念館・鎭海區志編纂委員會編, 招寶山(寧波: 寧波出版社,2006.6), p.58.

    19) (乾道)四明圖經 권1 分野 : “觀輿地圖則僻在一隅, 雖非都會, 乃海道輻湊之地, 故南則閩廣, 東則倭人, 北則高句麗, 商舶往來, 貨物豊衍. 東出定海, 有蛟門・虎蹲天設之險, 亦東南之要會也”(續修四庫全書本, 704冊, p.511). 여기의 고구려

    는 고려를 지칭함.

  • 中國史硏究 第64輯 (2010. 2)54가, 순화 6년(995)에 다시 항주로 복귀시켰다. 咸平 2년(999)에 항주와

    명주에 각각 설치했고, 얼마 후에 秀州(嘉興)・溫州・江陰 등 3곳을 증가시켰다. 남송 光宗(1190-94) 때에 항주를 폐지하고, 寧宗 때

    (1195-1224) 때 수주, 온주, 강음을 다시 폐지시켰다. 이로부터 명주는

    대외교역을 전담하는 유일한 창구가 되었다.20)

    명주는 한반도 국가와 일찍부터 수로 교통이 개설되었다. 일찍이 신

    라상인들이 명주 지역을 오갔고, 신라사신 金張廉 일행이 명주에 표착

    하기도 했다.21) 훗날 고려 사신과 상인들이 빈번히 수로를 통해 명주

    에 도착했고, 고려 민간인도 명주에 표착한 경우가 종종 발생했다.22)

    송 희녕 연간에 명주는 고려와의 공식적인 사신이 진출입하는 항구로

    지정되었다. 요나라는 대륙 북쪽에서 크게 일어나 연이어 송나라를 강

    하게 밀어붙였다. 이로 인해 고려와 송나라 사이에 그동안 산동 등주

    로 오가던 봉사노선이 크게 위협받게 되었다. 文宗 28년(熙寧 7년;

    1074)에 고려 사신 金良鑑은 登州(蓬萊)가 지리적으로 거란족 요나라

    와 근접해있는 관계로 명주(영파)로 변경해주기를 요청했다.23) 이 보

    다 몇 해 전인 문종 23년(희녕 2년; 1069)에 고려는 명주보다 훨씬 아

    래 지역인 泉州를 봉사노선으로 바꿔주기를 요청한 적이 있었다.24) 송

    20) (寶慶)四明志 권6 舒賦下・市舶 : “浙務初置杭州, 淳化元年徙明州, 六年復故. 咸平二年, 杭・明二州, 各置務. 其後, 又增置于秀州・溫州・江陰軍, 在浙者凡五務. 光宗皇帝嗣服之初, 禁賈舶至澉浦, 則杭務廢. 寧宗皇帝更化之後, 禁賈舶

    江陰及溫・秀州, 則三郡之務又廢. 凡中國之賈, 高麗與日本諸蕃之至中國者, 惟慶元得受而遣焉”(續修四庫全書本, 705冊, p.78).

    21) 三國史記 권10 憲德王 : “(9년 동10월) 遣王子金張廉入唐朝貢”(乙酉文化社本, 원본, p.105); 권46 崔致遠傳 : “元和十二年, 本國王子金張廉風飄至明州下

    岸, 浙東某官發送入京”(乙酉文化社本, 원본, p.430).

    22) 고려 민간인이 명주 지역에 표착한 사례로 목종 3년(1000)에 池達 일행, 선종

    6년(1009)에 李動甫 일행, 숙종 8년(1101) 漢白 일행 등이 있다.

    23) 宋史 권487 高麗傳 : “往時高麗人往返皆自登州. 七年, 遣其臣金良鑑來言,欲遠契丹, 乞改途由明州詣闕, 從之”(中華書局本, p.14046).

    24) (寶慶)四明志 권6 舒賦下・市舶 : “熙寧二年, 前福建路轉運使羅拯言, 據泉州人黃眞狀 --- 高麗欲因眞繇泉州路入貢, 詔就明・潤州發來. 自是王徽・王運・王熙修職貢尤謹. 朝廷遣使亦密往來, 率道于明”(續修四庫全書本, 705冊, p.79).

  • 浙東 연해안에서 高麗人의 수로 교통 (朴現圭) 55나라는 이 이전부터 고려의 봉사노선이 적지와 가깝다는 문제점을 인

    식하고 있는 차에 이번에 고려의 요청을 받아들여 명주로 변경하였

    다.25) 송나라 사신들이 고려로 봉사할 때에도 등주에서 명주로 바꾸어

    한반도를 드나들었다.

    송나라는 새로운 봉사노선에 고려사신을 접대할 관사를 만들었다.

    王應麟 玉海 권172 宮室・邸驛・元豊樂賓館 에서:

    元豊二年, 明州及定海縣作高麗貢使館. 五月二十五日, 賜名樂賓. 자주:

    亭曰: 航濟(四庫全書本, 947책, p.461).

    원풍 2년에 명주와 정해현에 고려공사관을 지었다. 5월 25일에 樂賓이

    라는 이름을 하사했다. [자주] 정자는 항제라고 불렀다.

    원풍 2년(1079)에 명주와 定海(진해)에 고려공사관을 지었다. 명주와

    定海(진해)는 새로 개설된 봉사 노선에 소재한다. 명주에 건립한 고려

    공사관은 樂賓館이라 불렀고, 정해에 건립한 정자는 航濟亭이라고 했

    다. 항제정은 建炎 4년(1130) 금나라 군대가 절동 지역을 침범할 때 소

    실되었는데, 낙빈관도 이때쯤에 훼멸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북송 熙寧 연간(1068-1077)에 고려사신의 접대를 하기 위해 세운 同

    文館이 있었다. 동문관은 延秋坊에 소재하며, 관사 전체가 178간이나

    될 정도로 상당한 규모이다. 남송 소흥 3년(1133)에 고종은 장차 들어

    오는 고려사절을 위해 동문관을 보수하라고 명했다.26) 오늘날 영파학

    자들은 동문관이 영파에 있다고 보고 있다. 그 이유를 살펴보면, 동문

    관이 延秋坊이 소재한다. 연추방은 宋史에 언급한 宜秋坊을 말하며,(보경)사명지에 의추방은 東北廂에 소재한다고 했다.27) 그런데, 여기

    25) 續資治通鑑長編 권158 慶曆六年五月丁未條: “新羅・ 高麗諸國, 往年入貢,其舟船皆自登州海岸往還. 如聞女眞・三韓已爲契丹所倂, 儻出不意, 則京東諸郡何以應敵?”(四庫全書本, 316冊, p.563). 慶曆 6년은 1046년이다.

    26) 玉海 권172 邸驛・熙寧同文館 : “在延秋坊. 熙寧中置, 以待高麗使[舍宇一百七十八間]. 七年正月以內臣掌之. 紹興三年二月四日, 以高麗遣使入貢, 詔葺. 法慧

    寺爲之. 旣而不至. 都亭以待大僚, 都亭西驛以待西蕃・阿黎・于闐・新羅・渤海,懷遠以待交趾, 同文以待靑唐・高麗”(四庫全書本, 947冊, p.461).

  • 中國史硏究 第64輯 (2010. 2)56에 문제가 있다. 동문관이 과연 영파에 있었는가? 동문관을 건립한 희

    녕 연간과 명주 낙빈관을 건립한 영풍 2년은 불과 몇 년 밖에 되지 않

    는다. 불과 몇 년 사이에 영파에 두 차례 고려사절을 접대할 관사를

    건립할 필요가 있는가? 동문관의 소재지 연추방이 반드시 명주 의추방

    이라는 연결 고리도 문제이다. 송사나 (보경)사명지에는 이 두 곳을 연결시키는 결정적인 단서가 없다. 따라서 동문관은 남송 수도 臨

    安(항주)나 타 지역에 건립된 관사가 아닐까 생각된다.

    남송 시대에 들어와서 남송은 명주에 또 하나의 고려사관을 건립했

    다. 정화 7년(1117) 樓異가 知隨州로 제수 받았을 때에 명주에 高麗司

    (來遠局)를 두고 巨航 두 척과 畵舫 백 척을 건조하고, 廣德湖를 개간

    하여 세수를 잡아 고려 사신들을 접대할 비용으로 충당할 것을 건의했

    다. 송 휘종은 누이의 건의를 받아들여 임지를 知明州로 바꾸고 이 일

    을 담당하게 했다. 누이는 이 일을 맡은 후에 조정에 溫州 船廠을 명

    주로 옮겨 장인들이 고려사관의 건립 공사에 참여하도록 주청했다.28)

    고려사관은 어디에 자리 잡았고, 언제 훼멸되었는가? 1999년 영파시

    에서 月湖公園을 정비할 때에 고려사관의 정확한 유적지를 발견했다.

    고려사관은 오늘날 海曙區 月湖公園 동편 寶奎巷 서쪽 끝자락에 위치

    한다. 고려사신은 隆興 2년(1164)에 마지막으로 명주에 들어온 이후 더

    이상 교류가 이루어지지 않았다. 이때쯤 고려사관의 용도가 철폐되었

    을 것이다. (寶慶)四明志의 기록에 따르면, 紹興 5년(1135)에 都酒務가 고려사관의 옆으로 옮겨왔고, 淳熙 7년(1180)에 송 相臣 史浩가 이

    곳 토지를 하사 받아 寶奎精舍라는 장서각을 세웠으며, 훗날 寶奎廟로

    27) 林士民, 宋麗江南交往的歷史遺迹跡-明州(寧波)高麗使館遺址發掘剖析 , 再現昔日的文明-東方大港寧波考古硏究 (上海: 上海三聯書局, 2005.11), pp.98-504;

    林士民・沈津國, 萬里絲路-寧波與海上絲綢之路 (寧波: 寧波出版社, 2002.10),p.187.

    28) (寶慶)四明志 권6 敍賦・市舶 : “政和七年, 郡人樓异除知隨州, 陛辭, 建議於明置高麗司, 曰來遠局, 創二巨航、百畵舫, 以應辦三韓歲使. 且請墾州之廣德湖

    爲田, 收歲租以足用, 旣對, 改知明州. 復請移溫之船場於明以便工役創高麗使行

    館. 今之寶奎精舍, 卽其地也”(續修四庫全書本, 705冊, p.80).

  • 浙東 연해안에서 高麗人의 수로 교통 (朴現圭) 57바뀌었다고 했다.29) 이 기록으로만 본다면 고려사관 자리에 훗날 都酒

    務, 寶奎精舍, 寶奎廟가 차례로 들어선 것으로 오인하기 쉬운데, 실제

    로는 고려사관의 인근에 들어섰던 유적이다. 1984년에 영파 해서구는

    高麗使館를 區級 文物保護單位로 지정했다. 최근 영파시는 고려사관의

    유적지 부근에 고려사관과 史迹陳列室을 건립했다.

    오늘날 복원된 고려사관의 대청 좌우에는 고려사관의 건립 과정의

    내용을 담은 徽宗御筆石碑 2기가 진열되어있다. 한 기는 휘종의 御筆

    비석이다. 높이는 127cm이고, 폭은 109cm이며, 두께는 25cm이다. 비수

    부분은 원형이고, 테두리에 8마리 盤龍이 새겨져있다. 비문에는 정화 8

    년(1118) 1통, 重和 2년(1119) 1통, 宣和 1년(1119) 3통 등 성지 5통이

    수록되어 있다. 여기에는 송 휘종이 누이에게 고려사관 건립과 선박

    건조를 명한다는 조서를 담고 있다. 비음기에는 嘉定 5년(1212)에 누이

    의 손자 樓鑰이 이 비석을 건립한 과정을 담고 있다. 다른 한 기는 휘

    종의 조서를 중서성으로 전달한 省降御筆 비석이다. 높이는 196cm이

    고, 폭은 110cm이며, 폭은 25cm이다. 비석의 상반부는 아주 깨끗한 편

    이나, 하반부는 심하게 마멸되어 글자 판독이 매우 힘들다. 현존 비문

    에는 정화 7년(1117) 1통, 정화 8년(1118) 3통 등 성지 5통이 수록되어

    있다. 이 비문에는 송 휘종이 누이에게 광덕호를 개간하여 농지로 조

    성하고, 개간 후의 작물 현황에 대한 내용을 담고 있다. 徽宗御筆石碑

    는 원래 누이의 下賜地인 月湖 錦照堂에 세워졌다. 남송 초에 集士港

    鎭 동북쪽 3km 떨어진 豊成村의 豊惠廟(속칭 太師廟)로 옮겨졌다. 풍

    혜묘에는 원래 비석 3기가 있었는데, 이 중 1기는 문혁 때 망실되었다.

    1986년에 徽宗御筆石碑 2기는 鎭鄕級 文物保護單位로 지정되었다.

    2004년 6월에 월호공원으로 다시 옮겨졌다. 2005년에 區級 文物保護單

    29) (寶慶)四明志 권3 敍郡・都酒務 : “美祿坊子城西南一百一十步. 皇朝天禧五年置. 紹興五年, 以其地爲通判南廳, 務遷於子城南平橋下街西高麗行衙. 淳熙七年,

    有旨以其地賜相臣史浩. 今寶奎精舍, 是也”(續修四庫全書本, 705冊, pp41-42); 권

    6 敍賦・市舶 : “今之寶奎精舍, 卽其地(高麗使館)也”(續修四庫全書本, 705冊,p.80).

  • 中國史硏究 第64輯 (2010. 2)58位로 승격되었다.

    5. 舟山 六國港口

    주산군도는 절강 북동쪽 1백여 개 도서로 이루어졌다. 주산은 춘추

    시대 甬東이라고 불렀고, 월나라에 속해있었다. 당 開元 26년(738)에

    翁山縣이 설치되었다가, 얼마 후 폐쇄되었다. 송 熙寧 6년(1073)에 昌

    國縣이 다시 설치되었고, 청 康熙 27년(1688)에 定海로 개칭되었다. 그

    후 여러 차례 행정 변화를 거쳐 오늘날 舟山市가 되었다. 주산은 예로

    부터 대륙 남북과 외국으로 향하는 해로의 길목에 자리 잡고 있다. 주

    산 바다에서 출발하여 동쪽으로 삼한(한반도)과 일본, 남쪽으로 복건과

    광동, 서북쪽으로 요동과 하북으로 나갈 수 있다.30)

    (大德)昌國州圖志에는 예전의 岑港 항구의 발전상을 기술한 대목이 있다. 이 책자 권4 敍水 에서:

    岑江港, 去州西北三十里, 舊謂之六國港口, 南北舟舶輻輳於此, 亦海州之

    一鎭云(四庫全書本, 491책, p.295).

    岑江港은 (昌國)州로부터 서북쪽으로 30리 떨어져있으며, 예전에 六國

    港口라고 일컫다. 남북의 선박들이 이곳에 모여들었으며, 또한 海洲의 한

    鎭이다.

    岑江港은 오늘날 岑港鎭의 항구를 지칭한다. 岑港鎭은 주산 본도 서

    북쪽 바닷가에 자리 잡고 있고, 행정구획으로 舟山市 定海區에 속해있

    다. 항만 모습은 S자 형태라 거센 파도를 피할 수 있는 천연 항구이

    다. 남송 시대에 잠항에 都巡檢寨를 설치하고, 開慶 元年(1259)에 절동

    4개 군(台・溫・明・越州)의 민간 선박을 관리했다. 원나라 초기에 일본과 동남아 국가를 공략하기 위해 잠항에서 해선을 건조하고 해전 연

    습을 하였다.

    30) (光緖)定海廳志 권14 疆域・山川 : “大海, ······東接三韓・日本, 南通閩・粤, 西北直抵遼東・京國”(中國地方志集成本: 浙江府縣志輯, 38冊, p.159).

  • 浙東 연해안에서 高麗人의 수로 교통 (朴現圭) 59예전에 잠항은 많은 외국의 선박들이 대해를 통해 들어와 정박했다

    는 의미에서 六國港口라고 불렀다. 여기의 육국은 반드시 6개 나라만

    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당시 이곳으로 들어온 다수의 해외 국가를

    통칭하는 말이다. 해외 국가는 일반적으로 동북쪽에 위치한 고려와 일

    본, 동쪽에 위치한 유구, 남쪽에 위치한 동남아 국가(占城, 蒲甘(緬甸),

    交趾, 闍婆, 爪哇 등)를 말한다. 당시 고려선박은 한반도에서 보타산

    해역으로 들어와 잠항으로 들어왔으며, 다시 잠항에서 나가 항주만 입

    구인 진해에 도달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6. 普陀山 高麗道頭

    보타산은 한반도와 절동 지역을 잇는 해로의 길목에 위치하고 있다.

    신라인들은 일찍부터 보타산에 진출하여 불사를 펼쳤고, 고려 시대에

    들어와서도 계속 활발하게 이루어졌다. 보타산에는 고려인들이 드나들

    었던 옛 길이 남아있다. 송 趙彦衛의 雲麓漫鈔 권2 補陁落迦山 조항에서:

    自明州定海縣, …… 自西登舟, 有路曰高麗道頭; 循東經普門嶺, 上有塔子

    峰, 旁曰梅岑. 自此又東復南入寺. …… 自東卽入遼東・渤海・日本・毛人・高麗・扶桑諸國(四庫全書本, 864冊, p.279).명주 定海에서 출발하여 沈家門에 도달해서 鹿獅山을 지나면 …… 서

    쪽 해안으로부터 오르면 高麗道頭라는 길이 있다. 동쪽으로 따라 普門嶺

    을 지나면 그 위쪽에 塔子峰이 있고, 옆에는 梅岑이라 불렀다. 이로부터

    또 동쪽으로 가다가 다시 남쪽으로 가면 사찰로 들어갔다. …… 동쪽으로

    는 遼東・渤海・日本・毛人・高麗・扶桑 등 여러 국가로 들어갔다.

    道頭는 길머리를 지칭한다. 보타산 서쪽 지역에는 예전에 선박들의

    출입구로 삼았던 司基灣이 있었다. 사기만은 梅岑峰 줄기와 白華山 줄

    기사이에 소재한 물굽이였다. 양쪽에는 산줄기로 둘러싸여 세찬 파도

    와 바람을 피할 수 있고, 물굽이가 안쪽으로 움푹 들어가 있어 옛 풍

    력선이 정박하기에 좋은 환경을 가졌다. 사기만은 명 天啓 연간 이후

  • 中國史硏究 第64輯 (2010. 2)60다섯 차례 방파제 공사와 민국 이후 대규모 간척 사업으로 인하여 매

    립되었고, 오늘날에는 각종 관공서와 건물들이 들어서 보타산의 행정

    과 상업의 중심지로 변모했다. 2001년에 王連勝과 胡牧는 그동안 문헌

    과 토박이의 얘기 속에서 전해오는 고려도두의 위치를 정확하게 밝혀

    내는 성과를 누렸다.31) 고려도두의 시발지는 사기만 입구에서 매잠봉

    서쪽 줄기로 올라가는 觀音洞 아래 지역, 즉 해군군사기지의 정문 부

    근이다. 이곳에서 산허리로 나있는 옛 길을 따라가면 普門嶺이 나오고,

    다시 앞으로 계속 나가면 보타산에서 가장 큰 사찰인 普濟寺가 나온

    다. 고려도두에서 보제사까지의 거리는 약 3km이다.

    고려도두는 당시 많은 고려인과 고려선박이 보타산을 드나들었던

    사실을 간접적으로나마 증명해준다. 고려선박들은 보타산 해역으로 들

    어서면 고려도두가 시작하는 사기만 입구에 정박시키고, 고려인들은

    매잠봉 아래 줄기에 나있는 옛 길을 따라 사찰로 나갔던 것으로 보인

    다. 이들은 예전에 신라상인의 경추처럼 사찰에 시주하거나 무사 항해

    를 기원했을 것이다. 이밖에 고려 忠肅王 6년(1319)에 忠宣王이 李齊

    賢, 權漢功 등을 거느리고 大都(북경)에서 보타산으로 내려와 降香을

    했고, 忠定王 3년(1351)에 懶翁和尙(惠勤)이 강남 유력 길에 보타산에

    들어온 적이 있으나, 본 논문 주제와 달라서 언급하지 않는다.

    7. 大陳島 高麗頭山

    大陳島는 절강 동부 台州列島에 속해있는 섬이며, 행정구역으로 절

    강 台州市 椒江區 大陳鎭에 속해있다. 대진도는 직선거리로 黃琅鄕 同

    頭咀와 가까우나, 해상 교통은 예로부터 행정 관할지인 초강으로 연계

    31) 고려도두의 유적지를 처음 발견한 이는 王連勝과 胡牧 두 명이었으나, 나중

    에 논문 발표 때에는 왕련승 이름만 보인다[ 海上絲綢之路 -普陀山高麗道頭探

    軼 (舟山晩報, 2001년 6월 1일); 普陀山有個高麗道頭遺址 (都市快報, 2002년 8월 1일) 참조]; 王連勝・胡牧: 普陀山古迹重大發現-高麗道頭遺址找到 , 왕련승 제공본; 王連勝, 普陀山高麗道頭遺址重現 (浙江海洋學院學報, 20卷 2期, 浙江海洋學院, 2003.6), pp.26-29, 48.

  • 浙東 연해안에서 高麗人의 수로 교통 (朴現圭) 61되어있다. 육조 때에 대진도는 東鎭山 또는 洞正山이라고 불렀고, 명나

    라 때 편찬된 鄭和航海圖(원명은 自寶船廠開船從龍江關出水直抵外國諸番圖)에 대진도라는 이름이 처음 보인다.대진도는 지리적으로 태주만 앞 바다에 소재하고 있어 해상교통과

    군사방어에 중요한 요충지였다. 이곳에 고려와의 해상교통과 관련된

    유적이 있다. (嘉定)赤城志 권19 山水門・山・臨海 에서:

    高麗頭山, 在縣東南二百八十里. 自此山下分路, 入高麗國. 其峰突立, 宛

    如人首, 故名(中國文史出版社本, p.299).

    高麗頭山은 (임해)현 동쪽 2백 80리에 있다. 이 산 아래 갈림길에서 고

    려국으로 들어갔다. 그 봉우리는 돌출해있으며, 마치 사람 두상과 닮은

    고로 명명되었다.

    고려두산은 항해 방향과 지형 특징이 결합해서 지명이 만들어졌다.

    고려두산 아래에는 갈림길이 있는데, 그 중의 하나는 고려로 들어가는

    길이다. 봉우리의 형상은 우뚝 튀어나왔고, 사람 두상처럼 생겼다. 그

    렇다면 고려두산은 어디에 있는가? 지금까지 고려도산은 동진산에 있

    다는 식으로 막연하게 언급되고 있었으나, 얼마 전에 필자의 현지답사

    에 의해 그 위치가 정확하게 밝혀졌다.32) 상기 예문에서 고려두산은

    임해현 동쪽 280리에 있다고 기술했다. (가정)적성지 黃岩 조항에황암현 동쪽 240리에 소재한 東鎭山에서 바다를 바라보면 돌출된 한

    암석이 있는데, 이 암석은 고려로 가는 배들이 항해 지표로 삼았다고

    했다.33) (가정)적성지 黃巖懸境 에 동진산은 오늘날 태주만 앞 바다에 그려놓았다. 앞에서 언급했듯이 동진산은 대진도의 옛 명칭이다.

    대진진에는 크고 작은 섬이 29개가 있는데, 그 중에서도 가장 큰 섬

    은 上大陳島와 下大陳島이다. 이 두 섬 사이에는 2.7km 떨어져있다.

    32) 박현규, 台州地區 羅麗 유적과 지명에 관한 고찰 (新羅文化 31집, 東國大學校 新羅文化硏究所, 2008.2), pp165-180.

    33) (嘉定)赤城志 권20 山水門・山・黃岩 : “東鎭山, 在縣東二百四十里. ……中有四嶴, 極險峻, 山上望海中, 突出一石, 舟之往高麗者必視以爲准焉”(中國文史

    出版社本, p.308).

  • 中國史硏究 第64輯 (2010. 2)62오늘날 大陳鎭 지도를 보면, 상대진도 동남쪽 끝자락에 高梨頭라는 지

    명이 있다. 高梨頭가 바로 高麗頭山이다. ‘麗’자와 ‘梨’자는 음가가 같

    다. 고려두산은 바닷가에 세워진 거대한 바위산이다. 바위산은 오랜 세

    월동안 비바람과 파도에 의해 마치 사람의 두상처럼 깎여졌다. 바위산

    뒤편으로는 수십 길이나 되는 절벽이 병풍처럼 둘러싸여 있다. 고려두

    산의 형상은 배를 타고 바다에서 바라보면 매우 뚜렷하게 보인다. 상

    기 (가정)적성지 黃岩 조항에서 보듯이 하대진도 屛風山에서도 고려두산을 바라볼 수 있다.

    고려두산은 고대 항해의 이정표이다. 예전의 풍력선은 주로 지형지

    물을 이용하는 근해 항법을 사용했다. 고려두산은 중국 대륙 남북을

    오르내리거나 외국으로 오가는 해상 교통의 길목에 소재하고, 또한 바

    위산의 형상이 매우 특이하여 뱃사람들이 항해 지표로 삼기에 매우 좋

    다. 송원 시대에 복건이나 광동에서 올라오는 배들은 고려두산을 갈림

    길을 삼아 북쪽으로는 명주, 보타산이나 고려로 향했을 것이고, 동쪽으

    로는 유구나 일본으로 향했을 것이다. 이와 반대로 고려선박들은 고려

    두산을 지나 절강 남쪽이나 복건으로 내려갔을 것이다.

    Ⅲ. 결 론

    한민족은 오래 전부터 바다를 통해 해외 각지로 진출하였다. 해외

    국가에는 한민족이 진출한 유적이나 지명이 많이 남아있다. 고려인들

    은 일찍이 浙東 지역으로 진출하여 여러 활동을 전개했다. 절동 지역

    은 당송 시대 浙江(錢塘江)을 경계로 동쪽 지역에 설정한 행정구획으

    로 오늘날 절강성 서북쪽을 제외한 전 지역이다. 절동 연해안 지역은

    수로 교통이 매우 발달되었다. 이곳 지역은 예로부터 한반도와 교류

    관계가 매우 빈번했다.

    영제묘는 절동운하가 시작되는 蕭山 입구의 묘우이다. 소산 유사가

  • 浙東 연해안에서 高麗人의 수로 교통 (朴現圭) 63고려사절이 탄 배가 절동운하를 따라온다는 소식을 듣고 영제묘에 나

    가 순조로운 선박 운행을 기원했다. 조아묘는 上虞 曹娥江의 강가에

    자리 잡았다. 고려사절이 조아묘에 나가 무사히 조아강을 건너 절동운

    하로 들어가기를 기원했다. 영파에는 송나라가 고려사신을 접대하기

    위해 세운 낙빈관과 고려사관이 있었다. 낙빈관은 원풍 연간에 건립되

    었고, 고려사관은 政和 연간에 樓異의 건의에 의해 건립되었다. 徽宗御

    筆石碑는 송 휘종의 조서에 의해 고려사관을 건설하고 비용을 조달하

    는 내용을 담은 석물이다. 이 석물은 원래 누이의 錦照堂에 있었던 것

    인데, 훗날 豊成村 豊惠廟로 옮겨졌다가 최근에 복원된 고려사관으로

    이전해놓았다. 航濟亭과 六國石刻은 항주만 입구 鎭海에 소재한 유적

    이다. 항제정은 송나라가 고려사신을 접대하기 위해 만들었고, 육국석

    각은 고려사신들이 이곳을 드나들었던 역사 사실을 기술하고 있다. 六

    國港口는 주산 본도에 소재한 岑港을 지칭한다. 고려선박들은 이곳에

    정박했던 역사 사실을 대변하고 있다. 高麗道頭는 고려인들이 보타산

    에서 정박하여 사찰로 나가는 옛 길이다. 高麗頭山은 태주만 앞 바다

    上大陳島에 소재한 바위산이다. 당시 고려로 향하는 선박들은 고려두

    산을 항해 지표로 삼았다.

    이와 같이 절동 연해한 지역에는 고려인 관련 유적과 지명이 많이

    남아 있다. 우리는 이러한 자료들을 통해 절동 연해안 지역으로 진출

    했던 고려인들의 제반 활동과 교통로를 알아보는데 많은 도움이 된다.

    고려인들은 한반도에서 남방해로를 통해 절동 연해안에 도달했다. 영

    제묘, 조아묘, 낙빈관, 고려사관 등은 고려인들이 절동 연해안 내수로

    를 통해 중국 내지로 진출했던 사실을 증명해주는 유적이고, 육국석각,

    육국항구, 고려도두 등은 한반도와 중국 남방 연해안을 이어지는 절동

    해로에 소재한 유적 또는 지명이다.

    끝으로 필자는 본 논문에서 언급한 절동 연해안 지역의 고려인 관

    련 유적과 지명을 활용하는 방안에 대해 생각해보았다. 필자의 관견인

    지는 모르겠으나 이들 유적과 지명에 한중 우호를 상징하는 기념 조성

    물이나 유적 복원 작업이 필요하다. 영파시에서 고려와 송나라의 우호

  • 中國史硏究 第64輯 (2010. 2)64를 상징하는 고려사관을 복원했고, 진해 招寶山街道에서 또 하나의 우

    호 상징물인 황제정을 복원하고 있는 중이다. 이와 같은 사업은 단순

    히 유적을 복원한다는 차원에서 벗어나 21세기 한중 양국이 지향해야

    할 우호 상징물로 남을 것이다.[燁爀之樂室; 己丑 陰元月 卄八日; 陽七

    月 二日, 韓中人文學會 第23回國際學術會發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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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中國史硏究 第64輯 (2010. 2)66(Abstract)

    Transportation Places of historic interests for

    people of Goryeo(高麗) to broad through

    Zhedong(浙東) watercourse

    Park, Hyun Kyu

    Zhedong area was an administrative area of Tang(唐)-Song(宋)

    Dynasty era, then these is a whole areas of Zhejiang province(浙江

    省) except northwestern area on today. In early people of Silla(新羅)

    could traveled Zhedong cross sea by ship. The historical places had

    a close relationship between the watercourse region in Zhedong and

    Silla in Korean peninsula, these relationships continued on by

    Goryeo era. Today there are many places of historic interests near

    the watercourse of Zhedong regarding traveling of the people of

    Goryeo.

    There are many historical places and records in Zhedong, like

    Ningji shrine(寧濟廟) in Xianshan(蕭山), Caoe shrine(曹娥廟) in

    Shangyu(上虞), Hangji pavilion(航濟亭) and Liuguo of stone

    carving(六國石刻) in Zhenhai(鎭海), Lehin hotel(樂賓館), Geryeo

    hotel(高麗使館), Huizong tombstone(徽宗御筆石碑) in Ningbo, Liuguo

    port(六國港口) in Zhoushan(舟山), Goryeo road entrance(高麗道頭) in

    Putuoshan(普陀山), Goryeo mountain(高麗道頭) in Dachen island(大

    陳島) and so on. These places of historic interest are very

    important information to survey for the Goryeo's people and their

  • 浙東 연해안에서 高麗人의 수로 교통 (朴現圭) 67works, like activities, watercourse and global management, in the

    Zhedong.

    주제어: 고려, 송, 절동, 수로 교통, 절강성

    關鍵詞: 高麗, 宋, 浙東, 水路 交通, 浙江省

    Keywords: Goryeo, Song, Zhedong, watercourse, Zhejiang province

    (2009년 12월 12일 원고 접수, 12월 12일 심사완료 및 심사결과 통보, 2010

    년 1월 9일 수정원고 및 소명서 접수, 2월 25일 게재확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