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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中國古代 國家 商業 經營의 傳統

    朴 健 柱 (全南大)

    Ⅰ. 서 언

    Ⅱ. 管仲과 桑弘羊의 국가 상업 경

    Ⅲ. 周禮에 보이는 국가 상업 경영의 기구

    Ⅳ. 춘추기 晏嬰과 范蠡의 국가

    상업정책

    Ⅴ. 상앙변법과 秦漢律 및 후한

    에서의 국가 상업 경영 문제

    Ⅵ. 결 언

    Ⅰ. 서 언

    전국기 이래 정치의 방향에 큰 영향을 준 이념은 유가와 법가였다.

    그리고 양자는 공통으로 民의 상업을 천시하였고, 商軮은 더 나아가

    그것을 억제하고 심지어는 탄압할 것을 주창하였다. 국가 정책상 중농

    억상의 입장은 후대까지 면면히 이어진 바가 있었기 때문에1) 국가의

    상업 경영이라는 주제에 대해서는 그간 별로 주목 받지 못하였다.

    고대 국가의 영역과 지배체제가 확대되어 가고 주변국과 대립 경쟁

    의 시대로 이어지면서 국가 재정의 확보는 위정자에게 중차대한 과제

    1) 謝華瞻, 重農抑商政策與西漢經濟 (南昌師專學報(社科版) 1984.3); 晋文, 從西漢抑商政策看官僚地主的經商 (中國史硏究 1991-4); 汪錫鵬, 入粟拜爵與重農抑商 (江西師範大學學報(哲社版) 1985.1); 이성규, 중국고대 抑商政策의 사회사적 배경: 賈와 祭儀의 관계를 중심으로 (고대중국의 이해 3,1997.4); 중국고대 상업의 성격에 관한 一試論 (중국고대사연구 12,2004.8); 戰國時代 私商抑制의 理念과 實際 (진단학보 50, 1980.12); 전국시대 관영 産業의 구조와 성격 (동방학지 30, 1982.12).

  • 中國史硏究 第81輯 (2012.12)2였다. 민으로부터의 賦稅類 징수만으로는 충분치 못한 경우가 많았고,

    징수액을 지나치게 높이는 것은 민의 생업을 무너뜨리는 것이 되었다.

    賦稅의 증액에 의지하지 아니하고, 재정을 충분히 확보할 수 있는 제

    도적 방안이 모색되거나 실제 마련하여 운영하였던 사례들은 없는 것

    일까?

    주지하는 바와 같이 前漢 武帝 때의 균수평준과 염철전매는 국가 상

    업 경영의 대표 사례이다. 그런데 그러한 국가 상업 경영이 그 때 처

    음 시행된 것일까? 그것이 첫 시행이 아니고 이전의 전례가 있다면

    先代에서 그러한 전통이 언제 어떻게 이루어져 계승된 것일까? 그 계

    승의 사례들로서 어떠한 사실들을 들 수 있을까? 그것이 계승된 면과

    중간에 단절되었다가 어느 때 다시 시행되고 있는 면, 그 운영 방식

    등에서 변화가 일어난 면 등의 전개 양상을 살펴볼 수 있을까?

    본고는 이러한 문제의식에서 출발하여 三代에서 후한에 이르는 시기

    의 국가 상업 경영의 전통 내지 전개양상과 그 의미를 살펴보고자 한

    다.

    종래 국어 晋語 4에 보이는 工商食官 의 해석에서 관부의 工商운영을 뜻한다는 견해가 있었지만, 曲英杰은 관부의 상업 경영을 뜻하

    는 것이 아니고 관영수공업에서의 工師, 工人 및 그 담당 운영관 및

    市를 운영 감독하거나 관부 수요 물자를 구입하는 직무에 있는 자들을

    가리키는 것이며, 周에서 춘추 전국에 이르기까지 국가 상업 경영의

    자취를 찾아보기 어렵다고 하였다.2) 즉 工은 관영수공업에 복무하는

    자이고, 商은 관부의 수요물자를 구입 조달하는 직무에 종사하는 자들

    일 뿐 국가의 상업경영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 문

    구 工商食官 자체로는 그의 견해와 같이 국가의 상업경영을 말한 것

    이 아니기 때문에 그 점을 지적한 것은 옳지만 이에 의해 先秦 전시기

    에 걸쳐 국가의 상업경영이 없었다고 단정할 수는 없다. 이 문구는 신

    분에 따른 고대 職官의 구성과 서열을 기술한 것이기 때문에 전반적인

    2) 曲英杰, “工商食官”辨釋 (中國史硏究 1985-2); 趙錫元, 周代“工商食官”的前前後後 (中國古代史論叢 8, 福建人民出版社, 1983,12).

  • 中國古代 國家 商業 經營의 傳統 (朴健柱) 3사항이 드러나 있지 않다. 先秦시기에 여러 변화가 있어 일률적으로

    국가 상업 경영의 여부를 논정할 수는 없다고 보는 것이 본고의 기본

    시각이다.

    그런데 필자는 周에서 漢에 이르기 까지 시기에 따라 국가의 상업경

    영이 시행된 때가 있고, 그렇지 않은 때가 있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라

    는 입장을 갖게 되었다. 즉 본고의 기본 시각은, 첫째 국가가 상업경영

    을 하지 않았고, 관영수공업은 방대하게 운용되었지만 그것이 관영상

    업까지 뜻하는 것이 아니며, 그러한 뜻이 적용되는 시기가 곧 상앙변

    법 이후의 秦이라고 생각한다는 점이고, 둘째는, 반면 西周에서 춘추기

    에 걸쳐서는 국가와 시기에 따라 매점매석과 轉販 등을 통한 국가 상

    업경영의 시스템과 그 운용 사례들을 여러 자료에서 입증할 수 있다는

    점이다. 본고에서는 이 두 가지의 기본입장을 논증하고자 한다. 먼저

    제1장에서 제3장까지는 전한 무제기에 뚜렷이 보이는 국가의 상업경영

    형태가 周禮 管仲 范蠡 晏嬰 등의 사례에서 입증될 수 있다는 점을설명하고, 제4장에서, 상앙변법에서는 그러한 상업경영이 보이지 않는

    다는 점을 논증하고자 한다, 아울러 상앙변법 이래 시행되지 않던 국

    가상업경영이 다시 복구된 전한 武帝期 이후의 몇 가지 모습을 조망해

    보고자 한다. 단지 본고가 專論하는 시기는 전한 무제기까지이고, 그

    이후 후한에 이르는 사정은 이후의 전개사에 대한 하나의 照望(視覺)

    을 제시하는데 머무른다.

    Ⅱ. 管仲과 桑弘羊의 국가 상업 경영

    주지하다시피 중국고대 국가상업경영의 대표적 실례는 漢武帝期의

    신재정책에 포함된 균수평준과 염철전매제이다. 균수평준의 운영실태

    에 대해서는 종래 여러 異見이 난립되어 온 바 있으나 그것이 국가의

    행정 시스템을 활용한 상업 운영이었음은 분명하다.

  • 中國史硏究 第81輯 (2012.12)4당시 卜式이 간언하길, “縣官은 마땅히 租稅를 먹고 입으면 되는 것

    인데 지금 상홍양은 관리들로 하여금 市場의 列肆에 앉아 물건을 팔아

    이익을 구하게 하고 있습니다.”(史記 平準書 )고 하였다. 이 재정책을 입안하고 추진한 桑弘羊은 그 기획안에 대해 무제에게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① 元封元年(前110) ······. 諸官府가 각자 물자를 구매하느라 서로 다

    투다보니 물가가 치솟게 되고, 천하의 賦稅物品을 운송하는데 혹은 그 운

    송비에 미치지도 못하게 되자 황제에게 청하기를, “大農部丞 數十人을 새

    로 증치하여 郡國에 나누어 파견해서 이 업무를 맡게 하고, 각기 縣에 나

    아가 均輸ㆍ鹽鐵官을 설치하여 각 遠方에서 그 물품이 (여타 지역에서)

    비싼 때에 商賈가 轉販하던 것을 賦(징수 대상 품목)로 하여 서로 수송

    조달하게 합니다.

    京師에 平準을 설치하여 천하의 委輸를 모두 받아들이고, 工官에 車

    등의 운송 도구를 마련하도록 하는데 그 비용은 모두 大司農에서 지원받

    도록 합니다. 大司農의 諸 官府는 천하의 貨物을 모두 차지하여 비싸면

    팔고, 싸면 구입합니다. 이렇게 하면 富商大賈가 큰 이익을 취할 바가 없

    게 되어 本(農業)에 돌아가게 되며, 만물의 값이 치솟지 않게 되어 천하

    의 물가를 억제하게 됩니다. 이를 이름하여 ‘平準’이라 합니다.3)

    이 자료에서 정부가 모두 차지하여 비싸면 팔고, 싸면 구입한 화물과

    그러한 상업 행위의 구체적 방법이 어떤 것이었는가에 대해서는 여러

    異見이 있고,4) 균수에서 상업경영의 측면을 인정하지 않는 일부의 견

    3) 史記 平準書 에 “元封元年 ······. 弘羊以諸官各自市, 相與爭, 物故騰躍, 以天下賦輸, 或不償其僦費, 乃請置大農部丞數十人, 分部主郡國, 各往往縣置均輸鹽

    鐵官, 令遠方各以其物貴時商賈所轉販者爲賦, 而相灌輸. 置平準于京師, 都受天下

    委輸. 召工官治車諸器, 皆仰給大農. 大農之諸官盡籠天下之貨物, 貴則賣之, 賤則

    買之. 如此, 富商大賈無所牟大利, 則反本, 而萬物不得騰踊. 故抑天下物, 名曰平

    準.”

    4) 종래의 대표적 견해만 소개한다. 吉田虎雄은 均輸란, 人民이 관청에 上納해야

    할 조세 및 제후의 공헌을 그 지방에서 생산이 많아 가격이 하락한 것으로 바

    꾸어 上納케 하고, 官은 이를 그 물품이 결핍하여 가격이 騰貴한 지역에 수송

    판매함으로써 물가조절과 함께 이익을 획득하기 위한 방법이다고 한다(兩漢租稅の硏究, 東京, 1942). 影山剛의 舊說에서는 貢獻物의 합리적 정리및 상품화를 통하여 재정적 이익을 도모한 것이라고 한다 ( 均輸平準と鹽鐵專賣 , 岩波講座 世界歷史 4, 1970). 山田勝芳은, 縣에 모아진 賦錢중 上輸分을 부가가

  • 中國古代 國家 商業 經營의 傳統 (朴健柱) 5해도 있으나 균수평준의 전반이 국가의 상업 활동이었던 것만은 대체

    로 인정되고 있다.

    한편 鹽鐵論 권1 本議篇 에서 均輸의 시행자인 大夫는 다음과 같이 균수법과 평준법을 설명하고 있다.

    ② 大夫가 말하였다. “예전에 郡國 제후들은 각기 그 지방의 특산물을

    貢獻 수송하였는데 왕래하기 번잡하고 물품의 품질이 좋지 않아서(좋지

    않게 변질되어서) 혹은 그 운송비에도 미치지 못하였습니다. 때문에 군국

    에서 수송관을 설치하여 서로 운송하여 전달해주도록 함으로써 遠方에서

    의 공헌을 편리하게 하였습니다. 까닭에 ‘均輸’라고 칭하였습니다.

    京師에 委府(貨物 委輸 官府)를 설치하여 화물을 총괄하고, 값이 싸면

    사고, 비싸면 팔게 하니 이로써 朝廷은 실리를 잃지 아니하고, 상인은 이

    익 도모할 길이 없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平準’이라고 칭하였습니다. 平

    準을 시행하니 民이 失職하지 않았고, 均輸를 시행하니 民의 (수송의) 노

    고가 균등해지고 적어졌습니다. 까닭에 平準과 均輸는 만물의 값을 균평

    하게 하고, 백성을 편리하게 합니다. 이익을 얻는 틈을 열어주어 民이 죄

    치가 높은 물품으로 전환하여, 균수에 의해 送付하였다. 이 收買를 맡은 官이

    균수관이고, 이전까지는 鄕에서 지출한 운반비를 이 균수관에게 납입시켜 균수

    관이 僦人 僦人을 조직하여 운반하고 또 매매도 행했다고 본다 ( 均輸平準と

    桑弘羊 -中國古代におけろ財政と商業- , 東洋史硏究 40-3, 1981.12; 漢代財政制度變革の經濟的 要因について , 集刊東洋學 31, 1974).한편 위와는 달리 균수의 상업운영을 부정하는 견해도 있다. 影山剛의 新說

    에서는 舊說을 변경하여 상업적 측면은 平準에 있을 뿐, 균수는 단시 그 語義

    에서 보이는 바와 같이 現物 財貨의 합리적 運送 改革이었다고 보았다. 이 견

    해에 의한다 하더라도 평준의 상업경영은 인정되기 때문에 무제기 신재정책에

    상업경영의 내용이 있었다는 것이 된다( 桑弘羊の均輸法試論 , 東洋史硏究40-4, 1982.3). 또 侯家駒는, 균수에 대해 조세징수물(주로 곡물)을 錢 또는 布

    帛으로 折納케하여 중앙에 운송하고, 京師 부근에서 실물을 구입하는 것이었다

    고 하였다( 均輸平準所考 , 大陸雜誌 50-4, 1979). 이 설은 균수에서 購入은인정하되 賣出은 인정하지 않고 있다. 그러나 지방 군현에 많은 倉이 시설되어

    있었고, 항상 곡물의 확보 비축은 국가의 중대사였으며, 곡물을 錢으로 折納케

    하는 사례는 먼 후대에나 나오는 사항이고, 京師에서 소요되는 방대한 식량을

    그 부근에서 모두 구입하여 충당한다는 것은 京師 부근의 곡물 비축을 자칫

    공허하게 만들게 된다는 점을 해명하기 어렵게 되어버린다. 또한 다음에 소개

    하는 자료 ②에서 균수의 대상을 貢獻物로 명기한 점도 해명하기 어렵다. 또

    한 이렇게 상업경영을 부정하는 견해들은 모두 사기, 염철론 등에 보이는상업경영의 실상을 해명하지 못하고 도외시하였다는 문제가 있다.

  • 中國史硏究 第81輯 (2012.12)6를 짓는 실마리를 제공해주는 제도가 아닙니다.”5)

    이 기사에 의하면 한무제의 신재정책 시행 이전에 균수평준이 시행된

    바 있고, 그 때의 균수평준의 취지와 대상은 다음과 같은 것이었다.

    (가) 균수의 대상은 貢物(공헌물과 산택원지세)이다. 6)

    (나) 貢物 운송상의 어려움으로 인해 운송비가 화물보다 높게 되고, 民

    의 수송 부담이 크며 불균등하다.

    (다) 각 지방 군국에 수송관(균수관)을 설치하여 서로 운송 조달케 함

    으로써 수송 부담을 덜고 균등하게 하는 효과를 거둔다.

    신재정책의 주관자인 大夫가 균수평준의 시행이 지니는 타당성을 제시

    한 내용인데 이전에 이러한 시행 내지 정책이 있었던 사실을 제시하고

    있다. 그런데 예전의 시행 내용 가운데 상업활동의 측면이 잘 보이지

    않는다. 여기에서 ‘서로 운송하여 전달해주도록 한다’ 라 한 것은 경사

    까지 운송하는데 각 군국이 그 영내 내지 일정거리까지만 운송하고 다

    음 군국이 이를 이어 전송하는 형태를 말한다(후술). 이는 곧 운송 부

    담의 균등을 뜻하고 ‘均輸’는 곧 이러한 효과로부터 칭해진 이름일 것

    이다. 그리고 운송의 편리함이 그 효과로서 제시되었다. 어떠한 운영으

    로 운송의 편리함이 이루어졌는지 위의 내용만으로는 알기 어렵다. 이

    와 관련하여 ‘군국에서 수송관을 설치하였다’고 기술한 점을 살펴볼 필

    요가 있다.

    이년율령 에 均輸律이 있어 위에서 大夫가 말한 무제기 이전의 균

    수평준법 시행이 사실로 입증된 셈이다. 그 조문은 다음 2개만 전한다.

    ③ “船車로 수송할 경우나 傳送하면서 津關을 출입할 경우에는 傳嗇夫

    5) “大夫曰, ‘往者郡國諸侯各以其方物貢輸, 往來煩雜, 物多苦惡, 或不償其費. 故郡

    國置輸官以相給運, 而便遠方之貢, 故曰均輸. 開委府于京師, 以籠貨物. 賤卽買,

    貴則賣. 是以縣官不失實, 商賈無所貿利, 故曰平准. 平准則民不失職, 均輸則民齊

    勞逸. 故平准·均輸所以平萬物而便百姓, 非開孔利爲民罪梯者也.’”

    6) 각 지역별 貢物은 그 지역의 특산물이고 또한 산택원지의 산물이다. 산택원지

    세의 일부가 공물이 되는 셈이지만 공물로 특정된 산품이 아니더라도 산택원

    지세 全般이 넓은 의미의 공물에 들어간다고 할 수 있다.

  • 中國古代 國家 商業 經營의 傳統 (朴健柱) 7吏 嗇夫 ․吏와 敦長 ․方長이 각각 ( )( )하고, ( )( )( )( )發( )

    置皆如關( ).” (225)

    “船車有輸, 傳送出津關, 而有傳嗇夫 吏 嗇夫 吏與敦長 方長各( )( )而

    ( )( )( )( )發( )置皆如關( ).” (225)

    “(諸) ( ? ) (行) ( ? ) 津關門 ( ? ) 東 ( ? ) ( / ) ( )( )” (226)

    여러 글자가 결락되어 있고, 균수평준의 극히 소략한 일면 만을 보여

    주는 것이지만 이 업무를 전담하는 관서(균수관)에는 船車를 구비하였

    고(‘方長’은 船隊의 長), 실무담당의 여러 吏가 배속되어 있으며, 津關

    을 벗어나 화물을 傳送할 때 수행해야 하는 吏員이 규정되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여타 조목이 전하지 않지만 상홍양이 설명한 종전

    의 균수법에 상업 경영이 보이지 않는 것에 의하면 이들 운송관의 관

    부 물자 운송에 商販의 임무는 없었을 가능성이 크다.

    한편 文學은 大夫의 均輸 平準 시행의 타당성 제시에 대해 그 폐단

    과 문제점을 다음과 같이 지적하고 있다.

    ④ 文學이 말하였다. “옛적에 民에게 賦稅를 부과한 것은, 그 職工에

    따라 부과하였고, (전문의 職工이 아니어서) 제대로 만들지 못하는 民에

    게 부과하지 않았습니다. 농민은 그 수확물을 납부하였고, 女工은 그들의

    노동으로 얻은 것(布帛類)을 납부하였습니다. 지금의 현실은 가진 것을

    내놓게 하고, 없는 것을 문책합니다. 백성은 화물을 싸게 팔아 조정의 요

    구에 응하는데 편함을 삼습니다. 요즈음 군국에서는 간혹 民에게 布絮 생

    산을 강요하며, 관리들이 멋대로 (布帛을) 압류하여 놓고, (民이) 이를 판

    매하기 어렵게 하며, 관리들이 거두어들이는 것이 齊·阿의 縑이나 蜀·漢

    의 布만이 아닙니다.

    또한 민간에서 행해지는 사정이 이러합니다. 姦行으로 民의 産物을 일

    률적인 싼 가격으로 사들이니 농민은 이중으로 고통 받고, 女工의 産品

    (布帛類)에 대해 두 번 세금을 부과한 것이 되니 (첫째 포백생산에 대한

    세금 즉 산택원지세, 둘째 싼 가격에 강제 매입)운송 부담의 균등화를 볼

    수 없습니다.

    縣官에서 함부로 징발하고 문을 닫아 市場을 마음대로 지배하니 만물

    을 모두 차지하게 되고, (縣官에서) 만들을 모두 차지하게 되니 물가가

    치솟고, 물가가 치솟으니 상인들이 이익을 취하게 되며, 상인들 자신이

    거래하면 관리들은 그들의 奸利를 눈감아 줍니다. 豪吏와 富商들은 화물

    을 쌓아두고 (그 수요가) 급박하게 되어 가격 오르길 기다리고, (民으로

    부터 화물을) 싸게 사들인 奸吏들은 싼 화물을 거두어서 비싼 가격으로

  • 中國史硏究 第81輯 (2012.12)8파는 이익을 취하니 准이 平함을 볼 수 없습니다.

    대저 옛적의 均輸는 (수송) 노역을 균등히 하여 貢物의 수송을 편리하

    게 하고자 한 것이었지 이익을 도모하여 만물을 매매하고자 한 것이 아

    니었습니다.”7)

    당시 균수의 실제 운영에서는 그 획득의 주요 대상이 布帛類였음을 말

    해주고 있는데 위에서 ‘女工의 産品(布帛類)에 대해 두 번 세금을 부과

    한 것이 된다’고 한 것은 포백생산에 대한 稅인 산택원지세를 기본으

    로 징수하고, 더 나아가 싼 가격에 강제 매입한 것을 말한 것이다. 여

    기서 문학은 ‘옛적의 균수는 (수송) 노역을 균등히 하여 공물의 수송을

    편리하게 하고자 한 것이었지 이익을 도모하여 만물을 매매하고자 한

    것이 아니었다’고 하였다. 즉 종전의 균수에는 본래 상업 활동이 없었

    다는 것이다. 또한 전기한 大夫의 진언에서도(②) 종전의 균수법에 상

    업적 측면은 보이지 않았다. 그런데 그 국가상업경영이 없었다는 ‘이전

    의 시기’가 한무제 이전의 전체 시기를 가리키는지 바로 윗대인 상앙

    변법하의 秦의 시기만을 가리키는지 분명치 않다. 본고에서 논구하고

    자 하는 핵심 과제가 바로 여기에 있다.

    따라서 한무제기 균수평준에 보이는 국가의 상업 활동이 桑弘羊에

    의해 처음으로 창안 되고 시행된 것일까? 그에 선행한 사례는 없는

    것일까? 하는 문제를 우선 검토해 보아야 한다.

    먼저 춘추기 管仲의 시책에서 보인다. 管子에 전하는 내용들이 모두 실제 시행된 것을 기술한 것은 아니겠지만 그러한 국가상업 경영이

    후술하는 周禮에서도 보이고, 춘추기 越의 범려(范蠡)에 의해 실제시행되었던 국가 상업 운영의 재정책이 史記 貨殖列傳 등에 보이

    7) “文學曰 ‘古者之賦稅于民也, 因其所工, 不求所拙. 農人納其獲, 女工效其功. 今釋

    其所有, 責其所無. 百姓賤賣貨物, 以便上求. 間者, 郡國或令民作布絮, 吏恣留, 難

    與之爲巿. 吏之所入, 非獨齊·阿之縑, 蜀·漢之布也, 亦民間之所爲耳. 行奸賣平, 農

    民重苦, 女工再稅, 未見輸之均也. 縣官猥發, 闔門擅巿, 則萬物幷收. 萬物幷收, 則

    物騰躍. 騰躍, 則商賈侔利. 自巿, 則吏容奸. 豪吏富商積貨儲物以待其急, 輕賈奸

    吏收賤以取貴, 未見准之平也. 蓋古之均輸, 所以齊勞逸而便貢輸, 非以爲利而賈萬

    物也.’”

  • 中國古代 國家 商業 經營의 傳統 (朴健柱) 9기 때문에 단순한 재정이론에 불과한 것이 아니었음을 알 수 있다. 管子 輕重篇 國畜 제73에 곡물의 풍흉에 따른 값의 큰 차이로 인해 발생하는 여러 폐해를 든 후 그 폐해를 해소하고 아울러 국가가 큰

    수익을 얻을 수 있는 방책을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까닭에 훌륭한 군주는 民에 부족한 것을 委輸해주고, 民에 남아도는

    것을 收買하는 조치를 시행합니다. 무릇 民에 (곡물, 화물이) 넘쳐나게 되

    면 이를 輕하게 여길 것이니(값이 떨어지는 것이니) 까닭에 人君은 이를

    輕(輕한 값, 低價)으로 구매해서 거두어들입니다. 民에게 부족하게 되면

    이를 重(귀중하게)하게 여길 것이니(값이 등귀함), 까닭에 인군은 이를(수

    매하여 저장해놓았던 화물을) 重(높은 값)으로 散(시장에 내어놓음)합니

    다. 수매로 거두어 들여 저장해 놓는 것은 輕(싼 값)으로 하고, 散(시장에

    내어 놓아 판매함)하는 것은 重(높은 값)으로 합니다. 까닭에 군주는 반

    드시 十倍의 이익을 얻게 되고 시장의 물가도 고르게 됩니다.”8)

    이 조치의 형태는 한무제기의 평준법 그대로이다. 이러한 조치로 “大

    賈 畜家가 吾民을 豪奪할 수 없게 됩니다.”고9) 한 것도 大商 부호가

    폭리를 취하여 민생을 해치는 것을 막는다는 효과를 제시하고 있는 상

    홍양의 경우와 일치한다. 또 同 國畜篇 에 이른다.

    “지금 인군은 民에게 세금을 징수하면서 명령하길, ‘10일 내에 납부하

    라’고 하면 재물의 가격이 10분의 9로 떨어지고, 명령하길, ‘8일 내에 납

    부하라’고 하면 재물의 가격이 10분의 8로 떨어지며, 명령하길, ‘5일 내로

    납부하라’고 하면 재물의 가격이 10분의 5로 떨어지며, 아침에 명령하여

    저녁에 납부하라고 하면 재물의 값이 10분의 1로 떨어집니다. 先王은 그

    러함을 알았던 까닭에 만민에게 세금을 (급박하게) 징발하지 아니하고,

    號令에 의거하였던 것입니다.”10)

    여기에서 先王이 세금을 (급박하게) 징발하지 아니하고, 號令에 의거하

    8) 管子 輕重篇 國畜 에 “故善者委輸于民之所不足, 操事于民之所有餘. 夫民有餘則輕之, 故人君斂之以輕. 民不足則重之, 故人君散之以重. 斂積之以輕, 散行

    之以重. 故君必有什倍之利, 而財之櫎可得而平也.” 管子全譯 (謝浩范·朱迎平譯注, 吉林人民出版社, 1996), pp.857-8.

    9) 同書 國畜 , p.859.

    10) 앞의 책, p.866.

  • 中國史硏究 第81輯 (2012.12)10였다고 한 것은 政令을 통해 재물을 通御하고 물가를 조절하며, 輕重

    의 術을 운용하여 국가가 수익을 얻는 것을 말한다(후술). 이 방면의

    수익을 통해서 국가는 백성에게 조세 납부의 독촉에 의지하지 않아도

    재정을 꾸려나갈 수 있다. 주지하는 바와 같이 한무제기에 연이은 外

    征으로 재정이 매우 다급한 사정이었는데도 불구하고 당시 세금 액수

    를 올리지 아니하고 성공리에 여러 전쟁을 이행할 수 있었던 것은 균

    수평준, 염철전매 등의 신재정책에 의한 인한 수익이 있었기 때문이었

    다. 여기에서 또한 이러한 시책이 先王에 의해 시행되었던 것이라고

    하였다. 管子에서는 堯舜 禹王의 사례를 들어 이러한 정책을 개진하고 있기 때문에 그 先王은 곧 이들을 가리킨다고 하겠다. 아울러 그를

    계승한 三代의 왕들도 가리키는 경우가 많다. 周禮에 이러한 類의시책을 맡는 관서가 기술되어 있음을 볼 수 있다(후술). 또한 同 국축

    편에 “先王은 재물을 守함으로써 民事를 제어하여 平天下한다”고11) 하

    였다(후술). 앞의 輕重之術은 단지 곡물만 대상으로 한 것이 아니라 상

    품이 될 수 있는 거의 모든 재화를 대상으로 하였다. 곡물을 제외한

    여타의 재화를 대상으로 한 상업활동도 輕重의 이론에 의한 것으로 이

    에 대해서는 管子 輕重篇 에 매우 상세하게 기술되어 있다. 그리고그 시책이 곧 균수법에 해당하는 것이었음을 그 내용으로 보아 알 수

    있다. 따라서 평준과 균수, 그리고 당시 함께 병행된 것으로 되어 있는

    (후술) 염철전매를 포함하면 거의 모든 産物이 국가 상업경영의 대상

    이 되었음을 알 수 있다. 先王이 모든 재화를 장악(守)함으로써 民事를

    제어하고 천하를 잘 다스릴 수 있었다는 것이다. 즉 이러한 여러 방

    면의 국가 상업경영은 재정상의 이익을 위한 것 뿐 아니라 民事를 제

    어함, 즉 통치상의 중요한 수단이기도 하였다.

    단지 管子의 成書 시기에 대해 종래 여러 견해가 있는데 각 편에따라 전국기에서 王莽시기까지로 보는 설이 제기된 바 있고, 특히 輕

    重篇은 왕망시기에 염철론을 抄襲하여 이루어진 것이라는 견해까지

    11) 앞의 책, p.865에 “先王以守財物, 以御民事, 而平天下也.”

  • 中國古代 國家 商業 經營의 傳統 (朴健柱) 11있지만12) 필자는 前考에서 염철론의 내용은 이미 널리 알려져 있는데 그 내용을 초습하여 이전에 전해오던 管子에 19편에 이르는 큰분량의 글(輕重篇)을 작성하여 새로 끼워 넣었다는 것은 납득하기 어

    렵고, 사마천은 일찍이 자신이 管子의 牧民 輕重 등의 여러 편을 읽었다고 한 바 있으며,13) 관자에서 보이는 諸家가 종합된 듯 한면은 諸家로 分枝되기 이전의 춘추기 지성인들이 일반적으로 諸家를

    함께 지니고 있으면서 時宜에 따라 적절히 그 일부를 펼쳤던 것을 반

    영한 것으로 이해해야 한다는 견해를 제시한 바 있다.14) 사기 등의사서에 전하는 관중의 여러 시책도 관자의 정책과 거의 일치한다.요컨대 관자에 보이는 여러 정책의 이념과 사상이 모두 관중의 것이거나 모두 실제 시행된 것으로 보기는 어렵다 하더라도 그 대부분이

    관중의 것이고 대부분 실제로 적용된 것으로 보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周의 천하 때 제후들이 臣服하였는데 나중에 신하에게 탈취당한 이

    유를 묻는 桓公에게 관중은 다음과 같이 답하였다.

    “군주가 땅을 나누어 납입해야 할 공물을 정하였는데 그 물품들은 시

    장에서도 똑같이 유통되는 것이었습니다. (臣服하던 大夫들이 富를 쌓은

    것은) 황금을 매매함도 하나의 방책이었고, 江陽의 珠를 매매함도 하나의

    방책이었으며, 秦의 명산의 曾靑(銅의 精)을 매매함도 하나의 방책이었습

    니다. 이는 이른바 적은 것을 많게 하고, 좁은 영역을 넓게 하는 것이었

    으니 軌出(輕重의 殘文)의 術을 운용한 것이었습니다.” 환공이 말하였다.

    “천하의 방책이 모두 輕重의 術을 운용하는 類인가?” (관중이 답하였다)

    “지금 나라의 곡물이 열 배가 되면 만물은 (상대적으로) 값이 낮아지는데

    (이 틈을 타) 大夫들은 賈人(원문 ‘之’는 ‘人’의 오자)에게 말하길, ‘당신은

    나를 위해 곡식을 운반해서 (팔고) 재물을 가져 오라’고 하였습니다. 곡물

    의 비싼 값 하나가 지금은 아홉이 되어 남게 된 것이니 (이는) 곡물이 重

    하고(값이 높고), 만물은 輕한(低價) 때문이었습니다. 이렇게 되니 나라의

    財富 아홉이 大夫에게 있게 되었습니다. 國은 일 년 만에 반대로 하나(10

    분의 1)가 되었습니다. (대부는) 재물의 아홉을 모두 倍의 重(높은 값)으

    12) 馬非百, 管子輕重篇新詮 (中華書局, 1979).13) 史記 권62, 管晏列傳 의 論贊.14) 박건주, 管仲과 孔子 (전남사학 18, 2002.6) 제1장. 관자에 대한 종전의여러 견해에 대해서는 이 글의 제1장에 소개 해설하였다.

  • 中國史硏究 第81輯 (2012.12)12로 시장에 내니 재물이 매출되어 화폐의 아홉(십분의 9)이 대부의 손에

    있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되니 화폐와 곡물의 이익분이 대부에 남게 되었

    습니다. 천자는 客位에 처하게 되었고, 政令도 때에 맞추어 발령되지 못

    하게 되었습니다(‘以時’는 ‘不時’의 오자). 예전부터 곡물의 교역 임무를

    이행하던 자들은 밖으로 도망하고, 제후들은 이들을 받아들여 임용하였습

    니다. 각 제후국은 연대하여 朋黨을 조성하고, 만물의 물가를 조종하면서

    民用을 제어하였습니다. 안으로는 대부들이 私利에 몰두하고, 盡忠하지

    않았으며, 밖으로는 제후들이 연대하여 붕당을 지어 합세하고, 예전부터

    곡물의 교역을 담당하던 자들은 도망갔습니다. 까닭에 천자가 그 권력을

    잃게 된 것입니다.”

    환공이 말하였다. “옳다.”15)

    요컨대 周 天子의 失權은 제후와 대부들의 輕重術을 통한 상업 경영에

    의해 일어난 것이었다고 한다. 예전부터 교역임무(상업경영)를 맡고 있

    던 국가의 담당 실무자들이 任職에서 벗어나고, 제후와 대부는 이들을

    끌어 들여 자신들의 상업경영에 활용하였다는 것이다. 따라서 輕重術

    을 통한 상업경영은 원래 周 初 이래 중앙정부에서 담당 관원을 두고

    시행되어 왔었다는 것이 된다. 원래 천자가 輕重의 術을 통해 천하의

    만물을 장악하고, 民用을 제어 내지 주도함으로써 효과적인 통치를 펼

    수 있었는데 그러한 운영을 대부가 상인과 결탁하여 앞서 행함에 따라

    그 이익이 대부에게 돌아가 버려 국왕의 힘은 미세해지고, 그 담당 관

    원들은 임무를 제대로 행할 수 없게 됨에 도망하였다가 대부에게 포섭

    되어 그 私利를 위해 복무하게 되었으며, 그렇게 힘을 얻은 제후와 대

    부의 연대 및 붕당 조성으로 천자의 지배권이 상실되었다는 것이다.

    司馬遷은 천하의 物産과 상업정책의 역사를 기술한 가운데 “管子(管

    15) 管子 輕重 山至數 제76. 앞의 책, pp.898-9. “君分壤而貢入, 市朝同流.黃金, 一策也. 江陽之珠, 一策也. 秦之明山之曾靑, 一策也. 此謂以寡爲多, 以狹爲

    廣, 軌出之屬也.” 桓公曰, “天下之數盡于軌出之屬也?” “今國穀重什倍而萬物輕,

    大夫謂賈之. ‘子爲吾運穀而斂財.’ 穀之重一也, 今九爲餘, 穀重而萬物輕. 若此, 則

    國財九在大夫矣. 國歲反一, 財物之九者皆倍重而出矣. 財物在下, 幣之九在大夫.

    然則幣穀羨在大夫也, 天子以客行, 令以時出. 熟穀之人亡, 諸侯受而官之. 連朋而

    聚與, 高下萬物以合民用. 內則大夫自還而不盡忠, 外則諸侯連朋合與, 熟穀之人則

    去亡, 故天子失其權也.” 桓公曰, “善.”

  • 中國古代 國家 商業 經營의 傳統 (朴健柱) 13仲)가 이를(태공망의 부국책) 修治하여 輕重을 맡는 九府를 설치하고

    시행하니 환공이 천하를 制覇하게 되었다.”고16) 하였다. 이 九府는 大

    府 玉府 內府 外府 泉府 天府 職內 職金 職弊인데 주례에 대부분 그직명이 보이고, 物産의 출납과 상업 관련의 직무를 맡는 관서들이다.

    제환공의 천하 제패에는 관중의 輕重策이 큰 역할을 한 것임이 이미

    널리 알려져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동 열전의 바로 앞 기사에서

    관중의 이 策은 태공망을 이은 것이라 하였다. 당시 바다에 가까운 營

    丘 지역을 분봉 받은 太公望(呂尙)은 鹽分이 많고, 인민이 적은 이 지

    역에 女功을 권하고, 技巧(수공업)를 극진하게 일으켰으며, 魚鹽을 유

    통시키니 사람과 재물이 잇대어 폭주하였다고 하였다. 군주에 의한 수

    공업 내지 염철의 생산과 판매의 경영은 이미 周初에 행해지고 있음을

    말해주고 있다.

    魏文侯(전445-396在位) 때의 白圭는 時變을 잘 살펴서 남들이 버리

    면 취하고, 남들이 취할 때는 이를 賣出하였으며, 추수기에 곡물을 취

    하면서 絲와 漆을 주고, 絲가 나올 때는 곡물을 주고 이를 취하는 등

    의 방식으로 경영하였는데 그는 “내가 생산을 경영함은 伊尹과 呂尙의

    謀策에 類하는 것이다”고 하였다.17) 대체로 후대에는 위와 같은 상업

    경영의 始原이 商初의 伊尹 내지 周初의 呂尙에 있는 것으로 인식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Ⅲ. 周禮에 보이는 국가 상업 경영의 기구고래로 周의 여러 제도를 전하는 주례에 대한 여러 문헌비평이 있어 왔지만 근래 새로운 자료들이 발굴됨에 따라 그 사실성과 효용성이

    더욱 증대되었다. 비록 아직 부분적으로는 수용하기 어려운 면도 있지

    16) 史記 권129 貨殖列傳 .17) 史記 권129 貨殖列傳 .

  • 中國史硏究 第81輯 (2012.12)14만 최소한 고대사회제도를 파악하는데 중요한 단서를 제공하고 있음은

    분명한 사실이다. 근래 발견된 다량의 전국진한 簡牘文書를 해독하는

    데 있어서도 주례는 가장 유용한 원전 자료가 되고 있으며, 주례에 의거해야 비로소 풀리는 구절이 상당히 많다.

    그런데 주례에는 위와 같은 국가의 상업 경영을 담당하는 관서가보인다. 먼저 주례 天官 冢宰 에 국가 수입의 9개 방면인 九賦를열거하였다. (1) 邦中의 賦, (2) 四郊의 賦, (3) 邦甸의 賦, (4) 家削의

    賦, (5) 邦縣의 賦, (6) 邦都의 賦, (7) 關市의 賦, (8) 山澤의 賦, (9) 幣

    餘의 賦의 9賦 가운데 (7) 關市의 賦, (8) 山澤의 賦, (9) 幣餘의 賦가

    輕重術에 의한 국가 상업경영과 관련된 것으로 보인다. 주례에서 국가의 수입 분야는 주로 地官의 속관이 맡고 있다. 그 속관 가운데 廛

    人은 市絘布(市稅), 總布(貨物稅), 質布(券契稅), 罰布[벌금], 廛布(화

    물보관세)를 징수하여 泉府에 납입한다. 또 屠者로부터 皮角筋骨을 징

    수하여 玉府에 납입하고, 남아 적체된 珍異食物을 거두어들여 膳府에

    납입한다. 泉府는 시장에서 매매되지 않아 남은 물품을 수매하고, 이를

    저장해 놓고 있다가 각 물품을 필요로 하는 民에게 빌려준다. 주로 빌

    려주는 곳은 제사와 喪事 때 필요로 하는 경우이고, 전자는 10일, 후자

    는 3개월을 대여해주는 기한으로 한다. 대여한 利子는 그 日數로 계산

    하여 수취하고, 國庫에 충당한다. 즉 시장에서 수매한 여러 물품들을

    바로 모두 국고에 넣는 것이 아니라 이를 본전으로 대여 사업을 펼쳐

    서 그 이익 부분 만 국고에 넣는다는 것이다. 項斌과 馬僔 등은 이러

    한 면이 후세 輕重과 平準의 濫觴이 된 것이라 하였다.18)

    그런데 주례 地官 土均 에 “土均은 토지(지역)를 균평하게 다스리는 施政을 관장한다. 지역을 守함을 균평하게 하고, 지역의 事를 균

    평히 하며, 지역의 貢을 균평히 하고, 邦國 都鄙의 政令을 조화롭게 하

    며, 刑禁과 그 施舍 禮俗 喪紀 祭祀를 모두 각 지역의 좋고 나쁨에 따

    라 행함으로써 輕重의 법이 되게 행하고, 그 금령을 관장한다.”라고19)

    18) 項斌 馬僔 梁寶柱 陳書明 編著, 中國古代財政思想史稿 (北京: 中國財政經濟出版社, 1993), p.25.

  • 中國古代 國家 商業 經營의 傳統 (朴健柱) 15하였다. 이 가운데 ‘지역의 貢을 균평하게 한다(‘以均地貢)’ 등을 ‘輕重

    의 법’이 되도록 행한다고 한 것은 한대 均輸法이 각지의 산택원지세

    내지 苑囿稅와 공헌물을 대상으로 하여 국가의 행정시스템으로 轉販하

    였고, 그러한 轉販이 곧 輕重의 術에 의한 것인 까닭에 양자가 상통하

    는 사항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주례 등에 보이는 고대의 ‘均’의 정치이념은 실로 여러 방면에 걸쳐 시현되어야 할 것이었다. 산택원지세와

    苑囿稅, 공헌물 등은 이미 주례의 여러 수취항목에 보이고, 이를 실물로 납부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그 운송부담으로 인한 不均이 많았을

    것이다. 따라서 이 방면의 均을 시행하기 위해 설치된 제도가 균수법

    일 것이다. 즉 地官 屬下의 土均이 곧 그 직책을 맡는 관서였다고 생

    각한다. 또한 이를 輕重의 법이 이루어지도록 시행한다고 한 것은 곧

    그 징수한 실물(산물, 물품)을 축적해둔 상태에서(重) 시장에 그 실물

    이 귀하게 되어 高價일 경우 이를 시장에 내어 놓아 물자의 均을 이룸

    과 동시에 물가를 조절하여(平準) 화물이 활발히 거래되는 輕의 상태

    를 이룬다. 또한 高價(重)로 판매할 수 있었기 때문에 국가는 상당한

    수익을 얻는다. 한편 어떠한 産物을 징수하여 축적된 상태에서 어느

    지역에서는 값이 하락한 상태이고(輕), 타 지역에서 高價일(重) 경우

    각 지방 행정기구는 이를 그 지역에 운반하여 高價로 판매한다. 이로

    써 그 지역은 그 물품의 값이 조절되어 적당한 선을 이루니 이 또한

    평준의 효과이고, 산물이 한 곳(지역)에 적체되지(重) 아니하고, 널리

    유통되어 輕의 효과가 있게 된다. 또한 국가는 이러한 전판을 통해 이

    익을 얻는다. 아울러 지방 행정기구의 이러한 상업활동을 통해 각 지

    역민이 산택원지세 내지 공헌물의 실물을 중앙에 운송하는 부담이 크

    게 경감되고, 각 지역의 도성 또는 인근 행정구역의 경계선까지만 운

    송하면 되기 때문에 각 지역의 운송 부담이 균등해진다. 그래서 수송

    면에서의 均인 均輸의 효과가 이루어진다.

    특히 漢에서 苑囿稅의 비중은 상당히 컸는데 그 곳에서 산출되는 魚

    19) “土均, 掌平土地之政. 以均地守, 以均地事, 以均地貢. 以和邦國都鄙之政令, 刑

    禁與其施舍禮俗喪紀祭祀, 皆以地媺惡, 爲輕重之法而行之, 掌其禁令.”

  • 中國史硏究 第81輯 (2012.12)16類 鳥類 果菜 광물류 곡물류, 무기생산에 소용되는 목재 철재등의 자

    재류를 직접 얻을 수 있었고, 잉여물이나 그 일부 구역을 대여한 수익

    이 있었다.20) 한대의 이러한 사정은 周禮에 이들 산물을 관장하는기구가 세밀히 배치된 것에 의하면 周 등 고대국가에서 거의 마찬가지

    였을 것이다.

    또한 주례 地官 旅師 에 다음 사항이 있다.旅師가 관장하는 업무는, ① 野에서 수확한 耡粟 屋粟 間粟을 모아두

    었다가 이를 사용함에는 質劑로써 하여 민간에서 균평이 이루어지도록

    하며,

    ② 그 쌓아놓은 곡식을 나누어주어 시혜를 베풀고 그 이익이 퍼지게

    하며, 그 政令을 고르게 한다.

    ③ 무릇 곡식을 사용함에는 봄에 나누어주었다가 가을에 거두어들인다

    (‘秋斂’).

    ④ 무릇 새로 농사를 짓겠다는 자들이 있으면 모두 이를 허용해주고,

    요역 징발을 하지 아니하며, 토지의 좋고 나쁨에 따라 (농지 지급 등

    을) 균등히 처리한다. 21)

    이 기사에 의하면 旅師는 野에서 수확된 여러 곡물을 모아 두었다가

    質劑를 통하여 民의 균평을 이룬다. 質劑란, 同書 地官 司市에 “司市는

    市의 治敎 政刑 量度 禁令. ······을 관장하며, ⑤ 量度하여 값을 정해

    서 매매되도록 하고, 質劑로써 신용이 이루어지게 함으로써 소송을 막

    는다.” 하였고,.22) 同書 地官 質人에 “⑥ 무릇 매매는 質劑로 이루어

    지게 하니. 大市는 質, 小市는 劑로 쓰게 하며, 市에서의 書契를 살피

    는 업무를 맡는다.”라23) 한 것에 의하면 여러 상품을 거래할 때 매매

    20) 山田勝芳, 後漢財政制度の創設について(下) (人文論究 38, 北海道教育大學函館人文學會, 1978.3).

    21) “旅師 ① 掌聚野之耡粟 屋粟 間粟. 而用之以質劑, 致民平, ② 頒其興積, 施其

    惠, 散其利, 而均其政令. ③ 凡用粟, 春頒, 而秋斂之. ④ 凡新甿之治, 皆聽之. 使

    無征役, 以地之媺惡, 爲之等.”

    22) “司市, 掌市之治敎政刑量度禁令. ······. ⑤ 以量度成賈而徵儥. 以質劑結信而止

    訟.”

    23) “⑥ 凡賣儥者質劑焉. 大市以質, 小市以劑. 掌稽市之書契.”

  • 中國古代 國家 商業 經營의 傳統 (朴健柱) 17자 쌍방이 거래 사실을 증명하기 위해 작성하는 매매증명서 내지 계약

    서이다. 大市에서는 質이라 하고, 小市에서는 劑라고 하는 2종의 거래

    증명서가 있었다(⑥). 주례 天官 小宰 의 “七曰, 聽賣買以質劑”에대한 鄭玄注에는 “質劑란 兩書를 一札에 기록하여 똑같이 나누는데 긴

    것을 質이라 하고, 짧은 것을 劑라고 한다. 傅别과 質劑는 모두 지금의

    券書다.”고24) 하였다. 또 大書 부분을 둘로 나누는 까닭에 別書라고도

    한다.25) 인용문 ⑤에서 매매 과정에서 일어난 문제로 소송이 발생할

    경우 司市나 質人 등의 관직에서 이 質劑를 증거로 판결한다. 이러한

    類의 증명서 사용은 秦漢律이나 한초의 판례문인 奏讞書에 보인다.二年律令 □市律 에 의하면 거래액을 관부에 自占(申告)하지 않은것에 대해 그 판매물과 매입전을 몰수하는 처벌 규정이 있다.26) 따라

    서 質劑는 去來稅 징수의 자료가 되기도 하였을 것이다. 그런데 이 質

    劑로써 모아진 곡물을 어떻게 하여 민의 균평을 이룬다고 한 것일까.

    인용문 ③에서 “凡用粟, 春頒, 而秋斂之”라 하였다. 무릇 곡물을 사용

    하는 것은 춘궁기인 봄에 공급해주고, 가을에 거두어들인다는 것이다.

    民에 곡물을 주고, 받을 때 당연히 그 증명서가 발급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래서 質劑로써 한다고 하였다. 民은 춘궁기에 농사지을 종자도

    없게 되는 경우가 많아 비싼 값에 곡물을 구하게 된다. 이 때 행정당

    국에서 쌓아 놓았던(重) 곡물을 시장에 풀어 놓으니(輕) 물가의 평준이

    이루어지고 또한 富商의 매점매석으로 인한 富益富 貧益貧의 불균등의

    문제가 해소될 수 있다. 그래서 ‘民平’이 이루어지는 효과가 있다. 그

    과정에서 행정당국은 상당한 이익을 취할 수 있다. 그 이익으로 빈민

    층에게 여러 施惠를 베푼다. 인용문 ②는 곧 그러한 면을 기술한 것이

    다. 인용문 ④는 새로 농사를 짓게 된 자들을 위한 조치이다. 새로 농

    사를 짓겠다는 이들에게는 이를 허용하고, (일정기간) 세금과 요역 징

    발을 면제해주며 농지 지급을 그 質에 따라 균등히 한다는 것이다.

    24) “質劑, 兩書一札, 同而别之, 長曰質, 短曰劑. 傅别 質劑, 皆今之券書也.”

    25) 安忠義, 漢簡中的官文書補考 (簡牘學硏究 4, 2004.12/2009.1), pp.178-9.26) “市販匿不自占租, 坐所匿租臧(贓)爲盜, 沒入其所販賣及買錢縣官, ······.” (260)

  • 中國史硏究 第81輯 (2012.12)18요컨대 주례의 이러한 사항들은 한무제기 상홍양이 제시한 균수평준의 운영 형태 내지 그 효과와 대부분 일치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주례의 이러한 사항들은 후대 균수평준의 濫觴이 되는 것이라기보다는(전술한 項斌과 馬僔 등의 견해) 이미 거의 비슷한 형태 내지 수준

    으로 시행되었거나 그러한 제도가 구비되어 있었다고 본다.

    Ⅳ. 춘추기 晏嬰과 范蠡의 국가 상업정책

    춘추 중기 齊의 國相이었던 晏嬰(전581-500)은 景公에게 진언하길,

    “君商漁鹽, 關市譏而不征. 耕者十取一焉, ······”이라 하고 있다.27) ‘君商

    漁鹽’은 곧 군주가 산택원지세로 수취한 魚物과 소금을 상품으로 운용

    한다는 것이다. 좌전 昭公20년조에서 晏嬰은 이르길, 현재 齊는 “산림의 木은 衡鹿이 守하고, 澤의 萑蒲는 舟鮫가 守하며, 藪의 薪蒸은 虞

    候가 守하고, 바다의 鹽蜄은 祈望이 守합니다. 縣鄙의 人은 그것들을

    징수하여 납입합니다.”고 하였다. 이와 같이 산택원지의 각 類別로 관

    리와 징세를 담당하는 관서가 설치되어 있음은 주례에 보이고, 지방관은 이를 징수 납입시켜 축적한다. 축적된 물품 가운데 魚鹽 등을 행

    정기구를 통해 국가의 상업 경영에 상품으로 운용한다는 것이 안영이

    진언한 내용이다. 광대한 영역의 산택원지에서 산출되는 물품을 徵稅

    하여 축적할 수 있는 量은 실로 방대하였을 것이다. 국가와 관부의 필

    요 용도를 넘어서 남아넘치는 항목도 상당히 많았을 것이다. 또한 그

    산택원지의 산품들은 대부분 상품화 될 수 있는 것이었다. 漢의 균수

    법과 염철전매제에서 그 대상이 산택원지세로 징수된 물품이었던 사정

    도 이와 다를 바가 없다. 단지 晏嬰의 策에서 소금의 상품 활용이 전

    매제 형태였는지는 분명치 않다.

    춘추 후기 越의 霸業을 이끈 범려(范蠡)의 상업 정책을 길게 기술한

    27) 晏子春秋 內篇雜下 .

  • 中國古代 國家 商業 經營의 傳統 (朴健柱) 19사마천은 그 말미에 “이를 修治한 지 10년에 나라는 부강해지고, 戰士

    에게 후하게 재화를 주게 되었으며, 전사는 矢石을 무릅쓰고 나아감이

    마치 갈증으로 물을 마시러 달려감과 같았다. 마침내 강력한 吳에게

    입은 치욕을 갚고, 中國(중원지역의 제후국들)의 군대를 査閱(觀兵)하

    여 五覇를 칭하였다.”고 하였다. 사기 권129 화식열전 에 기술된 범려의 상업 정책 기사는 “越王句踐······, 乃用范蠡 計然. 計然曰······.”

    로 되어 있어 計然의 策인 것으로 보인다. 計然은 범려의 스승으로 전

    해지는 인물인데 상세한 사항은 전해지지 않는다. 여러 자료에서 구천

    을 도와 패업을 이끈 자는 분명히 범려이고, 그는 또한 패업 달성 후

    타국(齊)으로 가서 경작과 상업 경영으로 대부호가 된 이력에 의하면

    그 策 내지 術을 국가 경영에 실행한 인물은 범려로 보아야 할 것이

    다. 貨殖列傳 의 기사를 각 단락으로 나누어 해설하고자 한다.

    (1) 知鬪則修備. 時用則知物, 二者形則萬貨之情可得而觀已. 故歲在金,

    穰 ; 水, 毁 ; 木, 饑 ; 火, 旱. 旱則資舟, 水則資車, 物之理也. 六歲穰, 六歲

    旱, 十二歲一大饑.

    (1) 전투하게 될 때를 알면 미리 修治하여 준비한다. 때에 맞추어 用하

    니 이는 사물의 이치를 아는 것이다. 二者(時用과 知物)가 드러나면 모든

    財貨의 사정을 파악할 수 있고 관찰하게 된다. 까닭에 金의 歲에는 풍년

    이 되고, 水의 歲에는 훼손되며, 木의 歲에는 기근이 들고, 火의 歲에는

    한해가 든다. 한해가 들면 舟를 마련해두고, 수재가 발생하면 車를 마련

    해두는 것이 사물의 이치이다. 6년에 한 번 풍년이 들고, 6년에 한번 한

    해가 들며, 12년에 한 번 대기근이 온다.

    이는 五行의 순환에 따라 전환되는 풍흉의 사정을 미리 알아 때에 맞

    게 그 年度에 필요한 사항을 준비하여 대비하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

    다. “한해가 들면 舟를 준비하고, 수재가 발생하면 車를 마련한다”고

    한 것은 이미 旱害가 들었으면 다음으로 水災가 이어 발생될 것이고,

    水災가 이미 발생하였으면 이후 旱害가 올 것이기 때문이다.

    (2) 夫粜, 二十病農, 九十病末. 末病則財不出, 農病則草不辟矣. 上不過八

    十, 下不減三十, 則農末俱利. 平粜齊物, 關市不乏, 治國之道也.

    (2) 무릇 곡물을 파는 경우, (평상 가격 1백을 기준하여) 20이면 농민

  • 中國史硏究 第81輯 (2012.12)20이 병들고, 90이면 상인이 병든다. 상인이 병들면 재화가 (시장에) 나오지

    아니하고, 농민이 병들면 개간하지 않게 된다. 오른 가격이 80을 넘지 아

    니하고, 하락한 가격이 30을 넘지 않으면 농민과 상인이 함께 이익이 있

    게 된다. 곡물의 판매를 잘 조절하여 만물의 값을 균등히 하며, 關市에서

    (지나친 세금으로) 핍박하지 않는 것이 治國의 도이다.

    곡물의 가격이 풍흉에 따라 급등락 하는 것이지만 그 가격차가 30에서

    80 이내에 머물도록 곡물의 판매 시 그 시기와 값을 잘 조절해야 한다

    는 것이다. 곡물 값의 사정에 따라 여타의 물품 값이 곧바로 영향을

    받기 때문에 국가의 적절한 平粜(곡물판매의 균평)가 齊物로 이어진다.

    여기서 국가에 의한 적절한 곡물의 판매와 收取 및 저장의 운영이 상

    정된다. 이는 곧 곡물을 통한 국가의 상업 경영이며 후대의 평준법과

    거의 같은 내용이다.

    (3) 積著之利, 務完物, 無息幣. 以物相貿易, 腐敗而食(蝕)之貨勿留, 無敢

    居貴.

    (3) (화물을) 쌓아 저장해두는 것으로 이익을 얻기 위해서는 (상품 가

    치가 훼손되지 않도록) 온전한 화물이 되도록 힘써야 하며, 화폐자금이

    停息(停滯)되지 않도록 해야 한다. 화물들을 서로 무역하되 부패되거나

    쉽게 변질되는 화물은 두지 말아야 하고, 감히 오래 두었다가 값이 오를

    것을 기다리는 것을 하지 말아야 한다.

    국가는 民으로부터 수취한 곡물과 산택원지의 산물을 대량으로 쌓

    아 두고 있다. 그 가운데 산택원지의 산물에는 부패되거나 쉽게 변질

    되는 물품이 있다. 이러한 물품을 저장해두고 있는 것은 손해를 초래

    한다. 漢 무제 때 제시된 균수의 효과 가운데 산택원지세 내지 공헌물

    로 수취된 물품 가운데 운송 도중 변질되어버리는 문제를 해소할 수

    있다는 사항이 있다. 대체로 그 방법은 그러한 물품을 곧바로 전판하

    고, 그 금액으로 운송 부담이 균등하며, 잘 변질되지 않고, 가치가 비

    교적 별 변동이 없으며, 규격화 되어 화폐 대용으로도 쓰이고, 수요처

    가 많은 布帛을 마련하거나, 또는 布帛으로 折納케 하는 것이었다.28)

    춘추기의 범려가 그러한 물품들을 어떻게 처리하였는지에 대해서는 기

    28) 박건주, 均輸의 대상과 ‘調’ -漢에 있어서 布帛收取 형태의 변화와 관련하여

    (전남대학교대학원석사학위논문, 1983.2).

  • 中國古代 國家 商業 經營의 傳統 (朴健柱) 21술되어 있지 않으나 한대의 균수법과 같은 방식이었을 가능성도 고려

    될 수 있다.

    (4) 論其有餘不足, 則知貴賤. 貴上極則反賤, 賤下極則反貴. 貴出如糞土,

    賤取如珠玉. 財幣欲其行如流水.

    (4) 그것(화물)의 남는 것과 부족한 사정을 논구해보면 값이 높거나 낮

    음을 알 수 있다. 값이 올라가 극에 이르면 (나중에는 결국) 반대로 낮아

    지게 되고, 값이 낮아져 극에 이르면 반대로 오르게 된다. 값이 높아지면

    마치 糞土처럼 내보내버리고, 값이 싸면 주옥과 같이 취한다. 財幣를 운

    용함에 적절히 하려거든 마치 흐르는 물과 같이 해야 한다.

    물품의 현 시세를 파악하여 그것의 고하를 따져보고 다음의 변화를 읽

    는다. 그 변화의 흐름에 따라 財幣를 적절히 운용하여 매매를 행하는

    것이 성공의 요체이다.

    이상의 策은 범려가 실제 국정에 적용하였고, 타국에 나가서는 개인

    으로서 상업 경영에 적용하여 대부호가 될 수 있었다.29) 한 무제시 상

    홍양의 策에서는 단지 (1)에서 오행의 순환과 풍흉의 週期에 입각한

    策의 면은 보이지 않지만 여타의 사항은 거의 大同小異하다 할 것이

    다.

    Ⅴ. 상앙변법과 秦漢律 및 후한에서의 국가

    상업 경영 문제

    전국기 名師들의 재정책 가운데 국가 상업경영을 주창한 내용은 거

    의 보이지 않는다. 단지 魏文侯 시기의 李克(李悝 전450-390)이 주창

    한 平糶法은 穀價를 균평하게 하고 상인의 專利를 막기 위한 것인데

    비해 전술한 計然이나 范蠡의 平糶法은 농민과 상인 모두를 이롭게 한

    다는 면에서 다르다.30) 또한 李悝의 策에서 국가의 상업 경영을 통해

    29) 앞의 項斌 馬僔 梁寶柱 陳書明 編著, 中國古代財政思想史稿, pp.52-55.30) 위의 책, pp.88-89.

  • 中國史硏究 第81輯 (2012.12)22재정상의 利를 도모하는 내용은 보이지 않는다. 단지 상인의 폭리를

    예방함으로써 결국 재정수입의 안정을 보장해준다는 뜻이 있는 정도이

    다.31) 그렇지만 현전하는 관련 자료가 일부에 지나지 않는 것이기 때

    문에 전반적인 사항은 그렇지 않을 가능성도 있다.

    후대 사회경제상 큰 영향을 준 상앙변법과 秦漢律에서는 국가 상업

    경영이 어떻게 반영되어 있는 것일까. 염철론 非鞅 에서 大夫는 상앙이 “外設百倍之利, 收山澤之稅, 國富民强, 器械完飾, 蓄積有餘.” 한 것

    을 칭찬하고 있는데 반해 文學은 오히려 그러한 시책으로 말미암아 백

    성은 곤핍하게 되고 궁극에는 나라를 멸망에로 이끌었다고 비판하였

    다.32) 대부나 문학이 함께 들고 있는 ‘外設百倍之利 ······ 器械完飾(完

    備)’ 는 운송기구(器械)를 완비하고 이를 통해 국가가 상업경영을 함으

    로써 많은 이익을 얻었다는 뜻으로 해석될 수도 있으나 상앙변법의 주

    요 내용을 기술한 사기 권68의 商君列傳 과 상군서에도 그러한사항이 보이지 않는다. 또한 근래 다수 발견된 신출 秦漢律에도 국가

    상업경영을 반영하는 조목을 찾기 어렵다. 단지 이년율령의 均輸律이 있지만 이 글 앞에 든 자료③의 殘簡 2개 조목이 있을 뿐이다. 현

    재까지 전하는 秦漢律은 어디까지나 일부에 지나지 않은 것이고, 현전

    하는 균수율도 일부 조목에 지나지 않기 때문에 이들 자료만으로 국가

    상업경영의 유무를 논단하기는 어렵다. 그런데 균수율의 조목 殘文 가

    운데 ‘船車有輸, 傳送出津關, ······’은 船車를 이용하여 수송하는데 津

    關을 벗어나 傳送할 경우 호송 담당관이라 할 傳嗇夫, 吏, 嗇夫(吏嗇

    夫?), 吏與敦長, 方長(船隊의 長) 등을 나열하고 있다. 이 船車의 운송

    수단이 관부에 속한 것이었는지 민에서 징발하거나 대여(僦)한 것인지

    불분명하나 均輸 관련 법률을 정하여 관련 업무가 이루어진 것에 의하

    면 관부가 갖추고 있던 운송수단이었을 가능성이 크다고 본다. 간혹

    전란기 군수물자의 긴박한 운송 필요에서 民의 운송수단을 징발하는

    31) 위의 책, p.89.

    32) 馬非百 注釋, 鹽鐵論簡注 (北京: 中華書局, 1984), pp.51-62.

  • 中國古代 國家 商業 經營의 傳統 (朴健柱) 23경우가 있지만 항상적인 균수업무의 필요상 국가 자체의 船車가 마련

    되어 있지 않으면 안 되었을 것이다. 국가의 균수 업무가 한무제기 이

    전에도 있었지만 염철회의에서 균수에서의 상업 활동이 문학에 의해

    비판받고 있는 것에 의하면 상홍양의 균수는 본래의 균수 업무에 국가

    에 의한 상업경영을 새로 추가한 것으로 이해된다. 漢武帝期 바로 이

    전의 균수법에 국가의 상업활동이 있었다면 상홍양이 균수를 통한 상

    업 활동으로 여러 이익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을 진언할 필요도 없었을

    것이고, 문학들이 그 폐해를 상홍양 등 실무자들의 탓으로 비판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렇다면 앞에 든 염철론에서 문학이 상앙을 비판하면서 ‘外設百倍之利 ······ 器械完飾(完備)’라 한 것은 어떻게 이해하여야 할까. 이것

    이 상업경영을 말한 것이 아니라면 關市의 征일 가능성이 크다.33) 또

    한 산택원지세 수익의 증대를 포함한 것이었을 가능성도 있다. 상군서에 특히 상술되어 있는 바와 같이 상앙의 국부론은 상업활동을 크게 억제하여 백성을 농업 증산에 몰두하게 하는 것에 주안점이 있었

    다. 그 상업경제책은 주로 민간의 상업 활동을 억누르고 농업 생산을

    크게 증대시키는 것이었다. 심지어 三晋의 民을 招來하여 경작민을 증

    대시키고 새로운 토지를 열심히 개간할 수 있도록 농민의 상업에로의

    이탈을 막는 등 여러 여건을 제공하고자 하였다. 이를테면 상군서墾令 에 “關市의 征을 무겁게 하면 농민이 상업을 싫어하게 된다.”

    고34) 하였다. 또 外內篇에서는 “농사를 짓지 않는 자들에 대한 징세를

    반드시 많게 하고, 市利에 대한 세금을 반드시 무겁게 해야 한다.”고35)

    하였다. 문학이 ‘外設百倍之利’라 한데서 ‘外設’은 곧 關市의 徵稅를 過

    徵하는 제도의 新設을 뜻하며, ‘百倍之利’는 상용되는 중국식 과장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한편 ‘器械를 완비하였다’고 한 것은 전술한 바와

    33) 項斌 馬僔는 工商에 대한 세금의 重課를 뜻하는 것으로 해석하였다. 앞의 中國古代財政思想史考, p.98.

    34) “重關市之征, 則農惡商.”

    35) “不農之征必多, 市利之租必重.”

  • 中國史硏究 第81輯 (2012.12)24같이 화물 운송 수단의 구비를 통해 均輸의 효과를 얻기 위한 것이었

    고, 여기에 상업 경영은 포함되지 않았던 것으로 본다. 춘추기 관중의

    조치에서는 關市의 징세를 크게 줄여서 상거래를 활성화 하고 증대케

    하여 그에 따른 市府의 거래세 상품세 등의 徵稅 수입을 증대시키고자

    하는 방법을 사용하였으나 반대로 전국진의 商鞅은 그것과는 정반대로

    상인에게 과도한 세금을 부과하여 백성이 상업에 진출하지 못하게 함

    으로써 농업생산을 증대시키고자 한 셈이다. 그렇다면 관부에서 민간

    상업에 대신하여 관영의 상업을 크게 일으킨 것이었을 가능성도 고려

    되지만 그러한 내용이 있었다면 이미 상군서나 사기상군열전에 그정책을 뒷받침하는 부분이 있어야 할 것이나 전혀 보이지 않고, 또한

    현존의 자료에도 그러한 사실을 보여주는 것이 없기 때문에 상앙의 개

    혁에서 국가에 의한 상업 경영은 없었을 가능성이 크다.

    그런데 전국기의 官營手工業에서 그 산품을 상품화 하여 판매하였다

    는 견해가 있다. 그 대표적인 연구에 李成珪선생의 견해가 있다. 氏는

    그 근거로 발견된 대규모 作坊遺址가 모두 관영이고, 운몽수호지진묘

    및 여타 지역의 출토품 상당 부분이 관부의 文記가 있는 점을 들고 있

    다.36) 그러나 관영작방에 비해 소규모였을 私設 작방은 쉽게 발굴에서

    드러나기 어렵다는 점이 있고, 관부의 文記가 없는 대다수 산품도 그

    文記가 있는 것과 똑같이 관영의 제품으로 해석된다는 논리를 펴고 있

    어 그 논거가 석연치 않다. 또 氏는 戰國秦에서 관영수공업제품이 상

    품생산에서 시장의 절대적 비중을 차지하였다 하고, 그러한 정책을 강

    력히 추진한 배경으로서 국가재정의 확충, 농한기의 농민 등 유휴노동

    력의 효과적인 활용방안, 工人을 장악하고, 민영산업 내지 大商의 성

    장을 크게 억제하여 齊民지배체제의 재정적 취약성을 해결하고자 함이

    었다고 하였다.37)그러나 시장 상품 가운데 관영제품이 다수를 차지한

    것이 사실이라면 위와 같은 정책 배경이 당연히 지적될 수 있는 것이

    36) 이성규, 戰國時代 官營産業의 구조와 성격 (동방학지 30, 1982.3), pp.137-139.

    37) 위의 글, pp.139-141.

  • 中國古代 國家 商業 經營의 傳統 (朴健柱) 25지만 그러한 사정을 뒷받침하기 위해 제시된 자료와 논거를 수긍하기

    어렵다.

    무엇보다도 전국진에서 관영수공업 제품을 상품화 하여 판매하는 방

    대한 사업 운영에 대해 규정한 율문이 전혀 보이지 않는다는 점에 유

    의해야 한다. 지금까지 새 간독자료의 연이은 발굴을 통해 戰國秦漢律

    의 상당 부분이 새로 알려졌고, 그 가운데는 관영수공업 운영과 관련

    된 여러 세부적인 조목들이 있지만 관영수공업 제품을 상품으로 판매

    하는 사항에 대한 율문은 전혀 보이지 않는다. 관영수공업 제품을 상

    품으로 판매하는 사업은 매우 많은 사항이 여러 방면에 복잡하게 연관

    되어 반드시 그에 따른 세부 규정이 있을 수밖에 없다. 관영수공업에

    관한 工律과 工人程 均工과 같이 충분히 독립된 律名으로 많은 조목들

    이 편제되어야 할 사항이다. 또한 그 복잡한 업무와 사무를 관리할 전

    담 부서와 관명이 있어야 할 것이나 보이지 않는다. 지금까지 발견된

    율문이 아직 온전한 전체 모습은 아니지만 관영수공업 관련 20여 조목

    이 보이는 반면에 상품 판매에 관한 조항이 하나도 없다는 것은 아무

    래도 그러한 정책이 아예 없었다고 보는 것이 오히려 타당성이 크다.

    또한 운몽진률 秦律雜抄 에 다음 조문이 있다.본 년도에 생산하기로 계획된 산품도 아니고, 조정의 명령서도 없는데

    감히 기타의 기물을 제조하였으면 工師와 丞에게 각 2甲의 벌금을 부과

    한다. 각 縣의 工官이 새로 올린 産品이 下等으로 평가되면 그 工官의 담

    당 색부에게 벌금으로 1甲을, 縣嗇夫(縣令) 丞 吏와 曹長에게는 각 1盾씩

    을 부과한다. ······. 38)

    이 율문에 의하면 군현의 관영작방에서 매년 생산해야 할 품목이 정해

    져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는 지방의 관영작방에서 제조하여 올리는

    제품들이 조정에서 필요로 하는 것이었음을 말해주고 있다. 만약 민간

    에 판매할 상품도 재정 수익을 위해 제조할 수 있었다면 이와 같은 처

    38) 睡虎地秦墓竹簡 秦律雜抄 , p.137에 “非歲紅(功)及毋(无)命書, 敢爲它器, 工師及丞貲各二甲. 縣工新獻, 殿, 貲嗇夫一甲, 縣嗇夫 丞 吏 曹長各一盾. ······.”

  • 中國史硏究 第81輯 (2012.12)26벌 규정이 제정될 필요는 없었을 것이다. 조정으로서는 상업 이익의

    증대를 통해 재정 확보만 이루어지면 좋은 일일 것이기 때문이다. 매

    년 제작 품목을 정해두는 것은 필요 없는 품목의 생산은 생산비만 낭

    비하는 것이기 때문일 것이다. 반면 이를 금지한 것은 이를 상품으로

    판매하는 제도가 없었음을 반영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한편 秦을 비롯한 전국기의 諸國에서 관영수공업이 이루어지고 있었

    고, 근래 그 제품들이 대량 발견된 바 있었으며, 그 실물의 존재에 근

    거하여 관영작방에서의 제품이 상품으로 판매되었다는 견해가 많지만

    그러한 관영수공업 제품의 존재가 민간에 판매된 것임을 증명해주는

    것은 아니다. 혹자는 그 제품들에 陶器 등 민간의 일상 용기류가 포함

    되어 있다는 점, 遠方에서 생산된 제품이 멀리 여러 곳에서 발견된 점

    등을 들고 있으나39) 당시 관부에서는 형도와 징발된 인력 등 대량의

    인원이 거처하였고, 관원과 군사 관노비등 관부에 衣食하는 층이 많았

    으며, 관영작방은 제품별로 지역에 따라 한정되었기 때문에 멀리 떨어

    진 관부의 용도에 조달된 것일 수 있다는 점 등을 고려해야 한다. 또

    한 전국에서 전한에 걸쳐 ‘某市’․‘某亭’․‘某市府’ 등이 戳記된 陶文이

    나 漆器類가 다수 발견되고 있는데 이에 의거하여 당시 관부의 市(亭,

    旗亭)에서 이러한 기물들을 제조하였으며, 그 잉여품을 민간에 판매하

    였다는 견해가 있으나,40) 이 또한 그 市府의 소유임을 명기한 것이거

    나 그 市府에서 필요하여 특별히 생산 조달을 의뢰한 것이어서 직접

    생산한 것은 아닐 가능성도 고려해야 한다. 단지 市府가 그 경내의 여

    러 수공업 作坊을 관리 감독하였을 것은 충분히 납득되는 사항이지만

    그 수공업 作坊이 官營이었다는 것을 입증해주는 것은 아니다. 그래서

    칠기류 등에 記入된 ‘某市’나 ‘某市府’는 단지 생산지(作坊의 위치)를

    39) 陸德富, 戰國時期地方官營手工業中的商品生産 (中國經濟史硏究 2011-3),p.98; 兪偉超 李家浩, 馬王堆一號漢墓出土漆器諸地諸問題 -從成都市府作坊到

    蜀郡工官作坊的歷史變化 (考古 1975-6).40) 兪偉超, 漢代的“亭”“市”陶文 (文物 1963-2); 兪偉超 李家浩, 馬王堆一號漢墓出土漆器諸地諸問題-- .

  • 中國古代 國家 商業 經營의 傳統 (朴健柱) 27표기한 것일 가능성이 있다. 또는 민간의 사설 작방에서 생산된 제품

    도 官市에서 매매되고, 市府는 그 생산 판매에 대해 徵稅하게 되는 까

    닭에 민간의 생산품이 여러 지역에 판매되기 위해서는 일단 市府에 제

    품세(생산세)를 납부하였다는 검증이 필요하였을 것이고 ‘某市’는 곧

    그 納稅印證의 표식이었을 가능성이 있다. 요컨대 ‘某市’나 ‘某市府’의

    명문도 이를 관영 作坊에서의 제품을 가리키는 것으로 단정할 수는 없

    으며, 私設 作坊이 所在한 市를 표기한 것으로 근래의 상품에서와 같

    이 그 생산자 내지 생산지를 표기한 것일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또한 1971년 新鄭의 ‘鄭韓古城’에서 발견된 전국말의 병기류에 보이는

    27건의 명문에 그 鑄造處로 左庫 右庫 武庫 (‘土’ 아래 ‘下’字) 庫가 있

    다.41) 이 사항은 戰國秦의 사례가 아닌 까닭에 본고의 논지에 해당하

    지는 않지만 그 字를 市庫로 인정한다 하더라도 이는 여타 세 곳의 庫

    가운데 市에 위치 한 庫를 지칭한 것일 뿐이고, 그 市에서 생산하였다

    허더라도 그 제품을 민간에 판매하였다는 것을 말해주는 것은 아니다.

    裘錫奎도 위의 병기류 명문의 (‘土’ 아래 ‘下’字) 字를 ‘市’字로 해독하

    여 당시 전국 韓에서는 市에서 병기 주조를 하였을 가능성이 있다고

    하였다.42) 또 齊 陶印에 보이는 ‘市工’에 의거하여 市에 工官 내지 工

    匠(工師)이 있었을 가능성을 제시하였다.43) 그렇지만 裘錫奎도 이 자

    료를 통해 전국기에 市에서 관영작방도 운영하였을 가능성을 제시한

    것일 뿐이고, 그 제품을 상품으로 판매한 것이라는 논급은 하지 않았

    다.

    또한 당시 市는 담장으로 둘러쳐져 있었고,44) 감시 경찰 임무를 수

    행하는 亭이 설치되어 있었다. 그 市와 관련하여 근래 출토된 다음의

    관련 율문은 해석에 따라 오해를 일으킬 수 있기에 자세히 분석하고자

    41) 郝本性, 新鄭“鄭韓古城”發現一批戰國銅兵器 (文物 1972-10), p.35.42) 裘錫圭, 戰國文字中的“市” (考古學報 1980-3), p.294.43) 裘錫奎, 앞의 글, p.289.

    44) 二年律令 雜律 182簡에 “越邑里 官市院垣, 若故壞決道出入, 及盜啓門戶,皆贖黥.”(張家山二四七號漢墓竹簡整理小組, 張家山漢墓竹簡(釋文修訂本), 北京: 文物出版社, 2006), p.33.

  • 中國史硏究 第81輯 (2012.12)28한다. 원문 해석에 난점이 많으며, 갖가지 다른 해석이 있어 번역하지

    않고, 아래의 분석과 해설을 통해 의역한다.

    ⒜ 爲作務, 及官府市, 受錢必輒入其錢缿中, 令市者見其入, 不從令者貲一

    甲. 關市. (운몽진률 關市律 , p.68)⒝ 官爲作務 市及受租 質錢, 皆爲缿, 封以令、丞印而入, 與三辨券之, 輒

    入錢缿 中, 上中辨其廷. 質者勿與券. 租、質、戶賦、園池入錢(429簡),

    縣道官勿敢擅用, 三月壹上見金、錢數二千石官, 二千石官上丞相 御

    史. (430簡) (이년율령 金布律 )⒞ 金布律曰; 官府爲作務市, 受錢及受齎租、質它稍入錢, 皆官爲缿, 謹爲

    缿空, 嬃毋令錢(1411)能出, 以令若丞印封缿而入, 與入錢者參辨券之, 輒入錢

    缿中, 令入錢者見其入. 月壹輸(1399)缿錢, 及上券中辨其縣廷. 月未盡而缿盈

    者, 輒輸之. 不如律, 貲一甲. (1403) (岳鹿書院秦簡)이 세 율문은 市에서의 徵稅 항목과 방법 및 그 稅錢의 上輸에 대한

    규정인데 그 해석 문제는 상앙변법 이후의 秦에서 관영수공업을 통해

    상업경영도 시행한 것인가 하는 사항을 파악하는데 관건 내지 초점이

    되고 있다. 밑줄 친 부분의 해석 여하에 따라서 당시 관부작방에서의

    제품을 상품으로 판매한 것인가 그렇지 않은가의 상반된 견해가 제기

    될 수 있다. 高敏과 錢劍夫 및 山田勝芳, 重近啓樹는 사영수공업과 민

    간상인에 대한 징세규정으로 해석하지만45) 吳榮曾 張伯元 陸德富 黃

    今言 楊振紅은 관부작방에서 생산된 제품의 일부분을 商販한 것으로

    해석한다.46) 한편 악록서원진간 ⒞에 의거한 陳松長은 ‘官爲作務市及45) 단지 高敏은 전국진에서 관영작방의 산품을 상품으로 판매하였는데 한에서는

    감소하였다고 한다. 高敏, 從雲夢秦簡看秦的若干制度 (雲夢秦簡初探(增補本), 河南人民, 1981), pp.230-234; 錢劍夫, 秦漢賦役制度考略 (湖北人民,1984), pp.112-3; 山田勝芳, 秦漢財政收入の硏究 (汲古書院, 1993), pp.426-8;重近啓樹, 秦漢稅役體系の硏究 (汲古書院, 1999), p.78.

    46) 吳榮曾, 秦的官府手工業 , (先秦兩漢史硏究, 中華書局, 1995), p.200; 張伯元, 出土法律文獻硏究 (商務印書館, 2005), p.303; 陸德富, 戰國時期地方官營手工業中的商品生産 (中國經濟史硏究 2011-3); 黃今言, 雲夢秦簡所見秦的商品交換與市場管理 (秦都咸陽與秦文化硏究, 陝西人民敎育, 2003); 楊振紅,從張家山漢簡看秦漢時期的市租 (楊振紅 井上徹 編, 中日學者論中國古代城市

  • 中國古代 國家 商業 經營의 傳統 (朴健柱) 29受租 質錢’으로 句讀하여 병렬관계인 ‘市’(상품거래)와 ‘受租 質錢’이 모

    두 作務(수공업자)에 대한 것이라 한다.47) 그 作務가 관영인지 사영인

    지를 명확히 제시하지 않고 있으나 내용상 관영수공업에 대한 徵稅는

    상정하기 어렵기 때문에 사영수공업자에 한정한 것이 아닌가 한다.

    문제의 관건이 되는 사항은 관리가 受錢하여 벙어리저금통(缿)에48) 바

    로 넣어야 하는데 그 錢의 수입이 어디에서 온 것인가 하는 것이다..

    ⒜ 의 爲作務, 及官府市 에 대해 죽간정리소조는 “수공업 종사 및 관

    부에서 산품을 出賣한 것”으로 해석하였다. 이 해석에 따르면 관부에

    서 그 산품을 상품으로 판매하였다는 것이 된다. 李成珪는 위 율문을

    인용하고, “수공업 종사와 官府市를 並記한 것을 볼 때, 秦의 官府市가

    수공업생산조직을 직접 경영한 것이 분명하다.”고 하였는데 관부의 상

    업 경영을 직접 표현하지는 않았지만 그 글의 논지와 앞부분의 내용에

    의하면 관부의 상업 경영을 뜻하는 것으로 본 것이 분명하다. 윤재석

    은 최근의 수호지진간 譯注書에서 “수공업에 종사하고 관부를 위해생산품을 판매함” 으로 해석하였다.49) 이러한 해석들에 의하면 전국진

    에서 관영수공업이 동시에 상업 경영도 함께 행한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거의 같은 사항을 규정한 ⒝에 대한 京都大연구보고서는 ‘官

    이 제조 교역 및 租 抵當錢을 받은 때에는’으로 해석하여50) 그 ‘제조’

    가 관영인지 私營인지가 구분되어 있지 않고, 그 産品의 商販 여부도

    불분명한 해석이다.

    우선 명확히 해야 할 사항은, ‘官府市’를 ‘관부의 매매’로 해석하는

    견해가 있으나51) 관부의 매매에 대해 관부가 징세한다는 것이 되어

    社會, 三秦出版社, 2007), p.54.47) 陳松長, 睡虎地秦簡“關市律”辨正 (2010-7).

    48) 缿(항)은 漢書 권76 趙廣漢傳 의 注에 “缿, 若今盛錢臧甁, 爲小孔, 可入而不可出.”

    49) 윤재석, 睡虎地秦墓竹簡 譯註 (소명출판, 2010.1), p.151.50) 冨谷 至 編, 京都大學人文科學硏究所硏究報告 江陵張家山二四七號墓出土漢律令の硏究(譯注篇) ( 京都: 朋友書店, 2006), p.272.

    51) 佐原康夫, 漢代都市機構の硏究 (汲古書院, 2002), p.312; 陶安, 秦漢刑罰體系の硏究 (創文社, 2009), p.517.

  • 中國史硏究 第81輯 (2012.12)30합당하지 않다. 따라서 여기에서의 ‘官府市’는 私市와 대비되는 ‘官府의

    市’ 또는 ‘官府市에서의 상거래’이고, 이 구절은 일단 관부의 市에서 징

    수하여 缿에 넣게 되는 항목들을 열거한 것이다. ⒜ ‘爲作務, 及官府市’

    를 ⒝ ‘官爲作務 市’, ⒞ ‘官府爲作務市’에 대조해보면 ⒜는 응당 ‘官府,

    爲作務及市’가 되어야 하겠고, 그러한 견해도 제기된 바 있지만 ⒜에서

    ‘官府市’라 한 것은 징수의 주체가 당연히 관부인 까닭에 주어를 생략

    하고, 그 징수 대상을 여타의 私市와 구분하여 ‘官府市’라고 한 것일

    가능성이 크다. 그렇다면 오히려 ⒜가 ⒝와 ⒞보다 더 잘 된 기술이라

    할 수도 있다. 한무제의 算緡錢令에서 담장으로 둘러 처진 관부의 市

    이외에 居邑의 일반 교역처에서 거래하는 것에 대한 市租의 自占 납부

    도 규정하고 있는 것에 의하면52) ‘官府市’라 고 명기한 것은 그러한

    (私)市와 구분하기 위한 것일 가능성이 크다. 한무제의 算緡錢令은 종

    래 官府市에서의 市租 징수를 여타의 私市에까지 확대하면서 상업세

    납부액을 속이지 못하게 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이 두 사항을 전제로

    하여 다음에 그 수취 대상 항목을 분석해보아야 한다.

    먼저 收入 또는 징세의 대상이 되는 ‘作務’가 관영의 수공업인지 사

    영의 수공업인지를 명확히 해야 한다. 그런데 관영수공업 제품을 판매

    하는 경우 여타의 市租와는 그 회계 계통이 크게 다르고, 품목도 다양

    한데 이를 일괄하여 缿에다 넣고 封한 후 縣道--郡--중앙의 계통으로

    上獻(上輸)하게 되면 품목별 판매 회계도 이루어지기 어렵게 되어버린

    다. 관영수공업의 경우 그 생산원가와 판매 액수 등을 세밀히 판정해

    야 할 것이기 때문에 그 생산과 판매와 회계 결산이 관영수공업 담당

    관서의 독자로 이루어지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나 이러한 경영은 무

    척 방대한 시스템과 법규를 요하는 것인데도 그러한 시스템과 법규가

    보이지 않는다. 따라서 市內에 자리한 여러 作坊을 꼭 관영수공업으로

    만 볼 필요가 없다고 본다. 하나의 市內에 官營과 私營의 作坊이 공존

    하고 있을 수 있다. 특히 徵稅의 대상이라면 우선 私設 作坊을 상정하

    52) 漢書 武帝紀 , “元狩四年 初算緡錢”에 대한 臣贊의 注에 “諸賈人末作貰貸,置居邑儲積諸物, 及商以取利者, 雖無市籍, 各以其物自占, 率緡錢二千而一算.”

  • 中國古代 國家 商業 經營의 傳統 (朴健柱) 31지 않을 수 없다. 그러한 입장에서 문제의 구절을 다음과 같이 해석해

    볼 수 있다.

    위의 율문에 나열된 市에서의 징세 항목들은 주례 地官 의 속관인 廛人이 징세하는 대상으로 나열된 市絘布(市稅), 總布(貨物稅), 質

    布(券契稅), 罰布[벌금], 廛布(화물보관세)와 상통하는 것으로 보이는

    데 이를 참고하면 대략 다음과 같이 해석된다. ⒝의 ‘作務 市’에서 ‘作

    務’가 그 市에 자리한 여러 私設의 作坊에 대한 생산세를 줄인 말이라

    면, ‘市’는 그 제품의 매매세일 가능성이 크다고 본다. 다음으로 ‘租’는

    市의 列舍와 자리(場)를 사용하는 것에 대한 자릿세 내지 시설대여료

    와 사용료가 아닐까 한다. 이러한 징세 대상 항목도 있었을 것이기 때

    문이다. 다음으로 質錢에 대해서는 張家山漢簡整理小組는 ‘抵押’으로,

    高敏은 현대의 ‘典當’으로 해석하였다.53) 당시 市에 典當 抵押의 일도

    있을 수 있고, 雲夢秦律 법률답문의 “백성에 채무가 있다하여도 감히 멋대로 강제하여 質(抵押, 抵當)해서는 안 된다. 멋대로 강제하여

    質하면 모두 貲二甲에 처한다(有責(債), 勿敢擅强質, 擅强質及和受質者,

    皆貲二甲.)”(p.124)에 보이는 ‘質’은 抵押을 뜻하지만, ⒝와 ⒞에 보이는

    ‘質’은 다른 사정에서 기술된 것이다. 陳偉는 주례 地官 廛人 에 나오는 ‘質布’에 대한 孫詒讓 王與之 江永의 주석에54) 의거하여 매매 때

    市府가 발급하는 매매증명서인 質劑(三辨券)의 發給費用錢으로 해석하

    였다.55) 필자도 眞偉의 설이 타당하다고 생각한다. 그 이유는, 바로 뒤

    의 율문에 “與三辨券之, 輒入錢缿中”이라 하였고, ⒞에서는 “租、質它

    稍入錢”이라 한 것에 의하면 ‘稍入錢’, 즉 점차적으로 계속하여 들어오

    는 錢이란 곧 매매 때와 같이 연이어 납부되는 사항을 가리키는 것이

    고, 三辨券의 발급은 매매 때마다 이루어지는 일인 까닭이다. 漢書53) 高敏, 關于漢代有“戶賦”、“質錢”及各種鑛山稅的新證 -讀

    (史學月刊 2003-4).54) 孫詒讓의 正義에 “王與之云, 質布, 質人所稅質劑者之布也. ······. 江永云,······, 質劑蓋官作之, 其上當有璽印, 是以量取賣買之泉以償其費. ······.”

    55) 眞偉, 關于秦與漢初“入錢缿中”律的幾個問題 (考古 2012-8), p.72, “官府爲大型交易提供質劑而收取的稅金.”

  • 中國史硏究 第81輯 (2012.12)32권90 酷吏傳 尹賞傳 에 “장안 중의 輕薄 소년 惡子로 市籍이 없이 商

    販하고 作務하며, 鮮衣와 흉복에 갑옷을 입고 刀兵을 지니고 다니는

    자들을 모두 검거하여······”라56) 한 바와 같이 私營의 作務 제품도 판

    매되었고, 당시 市籍이 있는 사람 만 商販과 作務를 할 수 있었다. 그

    거래처도 담장으로 둘러 처진 官府市로 제한되었으며, 거래 사실을 증

    명하는 3分의 券이 市의 관서에 의해 발급되고 그 하나는 관서에 보관

    되었다. 이렇게 본다면 위의 율문에서 징수하여 缿에 넣게 되는 官市

    의 수입 항목은 관영수공업 産品의 商販에서 나온 수익금일 수는 없으

    며, 따라서 관영수공업이 동시에 국가의 상업 경영을 뜻하지는 않는다

    고 본다.

    단지 염철의 경우는 여타의 産品과 구별되는 특별 물품으로 管子에 이미 그 관영의 사업이 기술되어 있고, 전국기에 일정 지역과 시기

    에 (지방) 관부에 의한 염철의 개발 생산 판매가 실재한 바가 있다. 그

    러나 그 또한 일부 지역이나 국가에 국한되거나 일시적인 시행의 형태

    였다. 그렇더라도 염철은 국가 상업 경영의 대상 품목 가운데 가장 오

    래 지속되거나 자주 시행된 대표적인 항목이라 할 수 있다.

    요컨대 전국기 특히 상앙변법 이후의 秦에서는 염철 이외의 관영수

    공업으로 생산된 제품을 商販하는 국가상업 경영은 없었던 것으로 보

    는 것이 타당할 것 같다. 또한 제1장에서 제3장에 걸쳐 파악된 주례에서 춘추기에 이르는 고대 국가상업경영의 실례들에서 보이는 輕重理

    論에 의거한 물품의 매점매석과 轉販도 상앙변법기의 秦에서는 시행되

    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면은 상앙변법이 지니는 중요한 특징

    가운데 하나라고 하겠다. 아울러 한무제기의 신재정책에서 보이는 국

    가의 상업경영은 상앙변법 이전의 국가 상업경영 사례를 다시 복구 내

    지 계승한 것이라는 의미를 지닌다.

    핵심 과제에 대한 본고의 검토는 여기서 일단 마무리되는 셈이지만

    한무제기의 신재정책 이후에서 후한대에 이르는 기간의 전개양상에 대

    56) “雜擧長安中輕薄少年惡子, 無市籍商販作務, 而鮮衣凶服被鎧扞持刀兵者······.”

  • 中國古代 國家 商業 經營의 傳統 (朴健柱) 33해서는 여기서 세밀히 다루지 못하고 단지 몇 가지 기본적인 사실을

    제시하여 조망하는데 머무른다.

    尹灣漢墓簡牘의 東海郡下轄長吏不在署, 未到官者名籍 에 전한 말동해군 속하의 지방관 중에서 公務로 외출하여 아직 귀환하지 않은 22

    명의 명단과 각 用務(任務) 및 일자가 기록되어 있다. 이 가운데 다음

    의 사례는 市務에 관련되어 있다.

    쪽 - 條編號 官名 임무 출발일

    96-15 開陽丞 市魚就財物河南 九月卄一日

    96-16 卽丘丞 市□就□□ 九月卄一日

    97-3 厚丘右尉 市材 三月五日

    廖伯源(臺北中央硏究員歷史語言硏究所)은 ‘市魚就財物河南’에서의 ‘市’

    를 購買(買入)로 해석하고, ‘就’를 雇人하여 운반하는 ‘僦’로 해석하여

    魚를 구매하고자 운반인력을 고용해서 재물을 운반하여 하남에 출장

    간 것이라 하였다.57) 그러나 ‘�